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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영, 한 땀의 시간이 회화가 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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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영, 한 땀의 시간이 회화가 될 때

최성민 기자

기사입력 : 2026-09-21 12:05

- 세필로 직조한 시간...장인의 치열함이 묻는 현대회화의 길

제공=금보성아트센터
제공=금보성아트센터
[더파워 최성민 기자] 점에서 선으로, 선에서 면으로, 다시 색의 장으로 확장되는 김자영의 회화는 빠른 이미지 소비의 시대에 ‘오래 그린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세필을 바늘 삼아 캔버스를 수놓듯 축적한 그의 화면은 회화이면서 노동의 기록이고, 색채이면서 시간의 물질이다.

김자영의 작품은 멀리서 볼 때와 가까이에서 볼 때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멀리서는 청색과 백색, 녹색과 남색, 분홍과 보라, 주황과 노랑이 거대한 색의 흐름을 만든다. 때로는 빛이 번지고, 때로는 천이 접히며, 어떤 화면에서는 색의 층이 수직으로 흘러내리는 듯하다.

그러나 몇 걸음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 그 색면은 해체된다.

하나의 면이라고 생각했던 곳에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미세한 흔적이 모습을 드러낸다. 김자영은 세필로 작은 점을 찍고, 그 옆에 다시 점을 놓는다. 점들은 이어져 짧은 선이 되고, 선의 반복은 밀도를 만들며, 밀도는 마침내 하나의 면과 색의 공간으로 확장된다.

점-반복-선-밀도-면-색의 장.

이것이 김자영 회화를 구축하는 조형적 문법이다.

- 점묘가 아니라 시간을 축적하는 방식

그의 작업은 외형적으로 점묘적 특성을 지니지만 전통적인 점묘주의와는 출발점이 다르다. 신인상주의의 점묘법이 색점의 병치를 통한 광학적 혼색을 주요 원리로 삼았다면, 김자영에게 작은 점과 붓질은 색채 효과를 위한 최소 단위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의 최소 단위에 가깝다.

같은 세필을 사용해 같은 크기의 흔적을 반복하더라도 완전히 동일한 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손끝의 압력과 붓의 각도, 물감의 농도와 양, 화면에 머무는 순간이 매번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 미세한 차이가 수없이 누적되면서 화면에 기계적 반복으로는 얻을 수 없는 떨림과 호흡을 만든다.

그래서 김자영의 작품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무엇을 그렸는가’보다 먼저 ‘얼마나 많은 행위가 이곳에 축적되었는가’라는 질문과 만나게 된다.

작가는 이미지를 그리는 동시에 자신의 시간을 화면에 새긴다.

붓이 바늘이 되고 캔버스가 직물이 되다

김자영의 제작방식을 가장 적확하게 설명하는 비유는 바느질과 세공일 것이다.

바느질은 한 번의 거대한 동작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한 땀을 놓고 또 한 땀을 놓는다. 각각은 너무 작아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수천, 수만 번 이어지면 하나의 형상과 구조를 만든다.

김자영의 세필도 그렇다.

붓은 바늘이 되고, 물감은 실이 되며, 캔버스는 하나의 거대한 직물이 된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작업은 회화인 동시에 장인의 세공을 연상시킨다. 금속을 두드리고 돌을 갈며 실을 엮는 장인이 물질에 시간을 새기듯, 김자영은 캔버스에 자신의 시간을 축적한다.

중요한 것은 이 작업에는 지름길이 없다는 사실이다.

몇 번의 대담한 붓질이나 우연한 물감의 효과만으로 대신할 수 없다. 화면의 밀도를 얻기 위해서는 작가가 실제로 그 앞에 머물러야 한다. 손을 움직이고 다시 움직여야 한다. 작품의 물리적 표면과 작가가 견뎌낸 시간이 거의 정직하게 비례한다.

그래서 그의 화면에는 생략할 수 없는 시간이 있다.

제공=금보성아트센터
제공=금보성아트센터

- 미세한 노동에서 거대한 색면으로

초기의 청색 계열 작업에서는 이러한 특성이 더욱 분명하다. 작은 흔적들이 화면을 거의 빈틈없이 점유하면서 중심과 주변의 위계가 약화된다. 수많은 점과 짧은 선은 서로 얽혀 물결이나 암석, 오래된 문자와 지도, 세포조직 같은 이미지를 연상시키지만 어느 하나의 대상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여기서 회화를 지배하는 것은 형상이 아니라 밀도다.

이후 녹색과 남색, 백색과 황록색 등이 등장하면서 변화가 일어난다. 미세한 흔적들은 여전히 화면을 구성하지만 이제 색의 덩어리들이 서로 만나고 침투하면서 ‘색과 색 사이’가 중요한 조형 요소로 등장한다.

분홍과 보라, 청색과 적색이 중첩되는 작업에서는 그 변화가 더욱 뚜렷하다. 가까이에서는 미세한 붓질이 살아 있지만 뒤로 물러나면 개별 흔적들은 하나의 거대한 색막 속으로 잠긴다.

미시적 노동이 거시적 색채가 되는 순간이다.

최근 작업에서 나타나는 수직적 흐름도 주목할 만하다. 색면들은 직선으로 분할되기보다 휘어지고 좁아졌다 다시 넓어진다. 평평한 캔버스인데도 천이 겹치거나 커튼이 흔들리고 빛이 주름 사이를 통과하는 듯한 깊이가 만들어진다.

흥미로운 것은 제작방식과 최종 이미지가 이 지점에서 만난다는 점이다. 미시적으로는 바느질 같은 세필의 반복인데, 거시적으로 바라본 화면 역시 거대한 직물과 주름을 연상시킨다.

작은 붓질 하나가 한 땀이 되고, 한 땀이 선을 만들고, 선이 면을 만들며, 그 면들이 마침내 공간을 직조한다.

- ‘고정되어 있지 않은’ 회화

전시 제목 《고정되어 있지 않은》은 이러한 작품의 성격을 압축한다.

김자영의 화면에서 점은 점으로 끝나지 않는다. 선이 되고 면이 된다. 하나의 색 역시 독립적으로 고정되지 않고 이웃한 색에 스며들면서 새로운 색채적 관계를 만들어낸다.

관람자의 거리 또한 작품을 변화시킨다. 가까이 다가가면 거대한 색면이 수많은 작은 흔적으로 해체되고, 물러서면 다시 하나의 색과 공간으로 결집한다.

따라서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단순한 제목이 아니라 김자영 회화가 작동하는 방식에 가깝다.

그의 작품은 하나의 시점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보는 거리와 시간에 따라 해체되고 다시 구성된다.

그런 이유로 이 작품들은 전시장에서 한 번 보고 지나치는 것보다 오랫동안 곁에 두고 바라볼 때 더욱 많은 것을 내어주는 회화다. 처음에는 색이 보이고, 다음에는 표면이 보인다. 더 오래 바라보면 그 안에 축적된 손의 움직임과 시간의 층위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 빠른 시대에 느린 회화가 던지는 질문

바로 여기에서 김자영의 작업은 동시대 미술에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새로운 이미지와 기술이 빠르게 등장하고 소멸하는 시대다. 제작 과정뿐 아니라 이미지의 생산과 소비 속도도 급격히 빨라졌다. 이러한 환경에서 김자영은 오히려 가장 오래된 도구 가운데 하나인 붓을 들고 캔버스 앞에서 시간을 보낸다.

이것은 새로움을 거부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동시대 회화가 무엇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것인가라는 본질적인 문제와 관계된다.

개념이 중요해질수록 물질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기술이 이미지를 빠르게 생산할수록 인간의 손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순간적으로 소비되는 이미지가 넘쳐날수록 한 작품을 오래 바라보게 만드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김자영의 작품은 그 질문에 거창한 선언으로 답하지 않는다.

작가는 그저 다시 붓을 든다. 점 하나를 놓고 그 옆에 다시 한 점을 놓는다.

그 반복의 시간이 대답이다.

제공=금보성아트센터
제공=금보성아트센터

- ‘건강하다’를 넘어 ‘늠름한’ 회화

나는 김자영의 작품 앞에서 완성된 화면 못지않게 그것을 가능하게 한 시간을 생각한다.

장인의 공예품을 마주할 때 느끼는 경외가 있다. 결과의 화려함보다 그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감당했을 반복과 집중을 먼저 헤아리게 되는 순간이다. 김자영의 작업에서도 그와 같은 감정을 느낀다.

그래서 그의 작품세계를 처음에는 ‘건강하다’고 표현하고 싶었다.

그러나 건강하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오랜 반복을 견디며 자기 방법을 밀고 나간 회화에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 골격이 있다. 소리 높여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지 않아도 스스로의 무게로 서 있는 화면이 있다.

나는 그것을 ‘늠름하다’고 표현하고 싶다.

늠름함은 요란함이나 크기의 문제가 아니다. 자기 자리를 알고 그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는 태도다. 김자영의 회화는 작은 세필에서 출발하지만 그 작은 붓질이 축적되어 단단한 세계를 세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작업은 현대미술이 나아갈 수 있는 한 방향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그것은 과거의 장인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아니다. 새로운 형식과 개념을 추구하면서도 작품을 떠받치는 시간, 노동, 물질, 신체의 진실성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 오래된 가치가 오히려 오늘의 미술에서 새롭게 읽힐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자영은 세필로 점을 찍는 작가가 아니다.

그는 점과 점 사이에 시간을 놓고, 그 시간을 연결해 하나의 회화를 세우는 작가다.

작은 붓으로 이루어낸 거대한 시간. 한 땀의 반복으로 직조한 단단한 화면.

김자영의 그림은 화려해서 강한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을 견디며 스스로의 회화적 언어를 구축했기에 강하다. 그리고 바로 그 단단함 때문에 그의 작품은 오래 곁에 두고 다시 보아야 한다.

최성민 더파워 기자 Sungmin@thepower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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