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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6억 과징금 낸 회사, 전 대표에 149억 배상 판결…'회삿돈 벌금' 시대 끝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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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6억 과징금 낸 회사, 전 대표에 149억 배상 판결…'회삿돈 벌금' 시대 끝나나

이경호 기자

기사입력 : 2026-10-14 08:45

담합으로 회사에 약 496억원 손해…법원, 전 대표에 약 149억원 배상 명령
직접 담합 관여하지 않아도 내부통제·감시의무 소홀하면 책임 인정 가능
1997년 이후 주주대표소송 판결 294건뿐…상장사 사건은 63건에 그쳐
기관투자자 참여·증거 확보 제도·임원배상책임보험이 활성화 변수

위 사진은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으로 AI(인공지능)를 활용해 생성된 가상의 이미지입니다.
위 사진은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으로 AI(인공지능)를 활용해 생성된 가상의 이미지입니다.
[더파워 이경호 기자] 기업이 담합이나 불공정행위로 수백억원의 과징금을 내더라도 지금까지는 사실상 회사와 주주의 손실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임직원의 위법행위를 막을 내부통제시스템을 제대로 구축하지 않은 이사에게 회사가 입은 손해를 직접 배상하도록 하는 판결이 이어지면서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대표이사가 담합을 직접 지시하거나 관여하지 않았더라도 높은 법적 위험이 예상되는 업무에 대한 감시와 내부통제를 소홀히 했다면 개인적인 손해배상 책임을 질 수 있다는 판단이 나오고 있다. 기업의 과징금이 더 이상 단순한 '회삿돈 손실'로만 끝나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다.

14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지난 8월 법원은 제품·원재료 가격 담합과 입찰 담합 등으로 약 496억원의 과징금과 벌금을 부담한 K사와 관련해 당시 대표이사에게 약 149억원을 회사에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다른 전직 이사들에게도 각각 약 99억원과 50억원 범위의 연대 배상책임이 인정됐다. 다만 이번 판결은 1심 판단이다.

재판부가 주목한 것은 대표이사가 담합을 직접 지시했는지가 아니었다. 회사의 영업 전반을 총괄하는 위치에서 법적 위험을 관리할 내부통제시스템을 구축하고 실제 작동하도록 했는지가 핵심 판단 기준이 됐다.

피고 측은 담합에 관여하지 않았고 사전에 알지도 못했으며 실무자 개인의 일탈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대표이사에게 모든 직원의 직무집행을 감시할 의무가 있고, 높은 법적 위험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내부통제와 감시·감독 노력을 소홀히 했다면 회사 손해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 같은 판단이 이번에 처음 나온 것은 아니다.

2022년 대법원까지 간 D사 사건에서도 비슷한 원칙이 확인됐다. 건설사업 입찰 담합으로 과징금을 부담한 회사를 대신해 주주들이 전직 이사 10명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고, 법원은 임직원의 위법행위를 막기 위한 합리적인 정보·보고체계와 내부통제시스템을 구축하고 운영할 의무를 이사들이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이사의 감시의무가 자신이 직접 맡은 업무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규모가 크고 업무가 세분화된 회사라도 법 위반 위험이 높은 영역에 대해서는 관련 법규 준수 여부를 관리하고 위반 사실을 발견했을 때 시정할 수 있는 내부통제체계를 갖춰야 한다는 취지다.

주주가 이런 책임을 직접 묻는 수단이 '주주대표소송'이다.

원칙적으로 이사가 법령이나 정관을 위반하거나 임무를 게을리해 회사에 손해를 입히면 회사가 이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해야 한다. 하지만 회사가 움직이지 않을 경우 일정한 지분 요건을 갖춘 주주가 회사를 대신해 이사의 책임을 추궁할 수 있다.

비상장회사는 발행주식 총수의 1% 이상을 보유한 주주가 대상이고, 상장회사는 6개월 이상 발행주식 총수의 0.01% 이상을 보유한 주주가 대표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주주는 먼저 회사에 이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것을 서면으로 요구해야 하며 회사가 30일 동안 움직이지 않으면 직접 소송에 나설 수 있다.

여기서 일반적인 손해배상소송과 다른 점이 있다. 주주가 승소해도 돈을 주주 개인이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배상금은 회사에 귀속된다. 소송을 제기한 주주는 회사 가치가 회복되면서 자신의 지분만큼 간접적인 이익을 얻는 구조다. 이 때문에 소송 비용과 시간을 부담해야 하는 주주 입장에서는 적극적으로 대표소송에 나설 유인이 크지 않았다.

실제로 국내에서 주주대표소송은 아직 드물다. 1997년부터 2025년 9월 말까지 약 28년간 국내에서 나온 주주대표소송 판결은 294건에 불과하다. 이 가운데 상장회사와 관련한 사건은 63건뿐이었다.

소송이 활성화되지 못한 이유도 명확하다. 승소하더라도 주주가 직접 받는 경제적 보상이 제한적인 데 비해 수년간 이어질 수 있는 소송 비용과 시간 부담은 크다. 시가총액이 큰 기업의 경우 개인투자자가 지분 요건을 충족하는 것도 쉽지 않다.

무엇보다 회사 내부 정보에 접근하기 어렵다는 것이 가장 큰 장벽이다. 이사의 책임을 입증하려면 이사회 회의록과 내부 보고서, 회계자료 등 회사 내부 자료가 필요한 경우가 많은데 회사가 협조하지 않으면 일반 주주가 증거를 확보하기 쉽지 않다.

다만 상황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온라인 주주 플랫폼 등을 통해 다수의 소액주주가 지분을 모으고 공동행동에 나서기가 과거보다 쉬워졌고, 최근 기업 지배구조와 주주권 보호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기관투자자의 역할도 중요해질 전망이다. 개인주주보다 자금과 인력, 정보 접근 능력이 큰 연기금과 자산운용사 등이 주주대표소송을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 수단으로 활용하기 시작하면 제도의 실효성이 크게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증거 확보 제도 역시 변수다. 올해 1월 관련 법 개정을 통해 기술 탈취 분쟁 등에 적용되는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가 도입됐다. 전문가 사실조사와 자료보전명령, 당사자 신문 등이 포함됐다. 다만 현재 제도가 모든 주주대표소송에 포괄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닌 만큼 향후 일반 민사소송에서도 증거 접근성을 높이는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사의 배상책임이 커질수록 임원배상책임보험도 주목받을 가능성이 있다. 국내 상장사의 임원배상책임보험 가입률은 2010년 21%에서 2023년 75%까지 상승했다. 하지만 보험금 지급은 활발하지 않았다. 2023년 기준 보험료 대비 지급된 보험금은 1~2% 수준에 그쳤다.

향후 주주대표소송이 늘고 수십억~수백억원의 이사 배상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이 확대될 경우 보험 가입 여부뿐 아니라 실제 보장 범위와 보험금 지급 구조까지 기업의 중요한 지배구조 문제로 떠오를 가능성이 있다.

엄수진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주주대표소송까지 향후 활성화되면, 회사가 입은 손실에 대한 이사의 책임을 인정하는 판례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고 분석했다.

결국 변화의 핵심은 과징금을 누가 부담하느냐에 있다.

과거에는 담합이나 법 위반으로 과징금이 부과되면 회사가 비용을 부담하고 사건이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내부통제를 제대로 구축하지 않은 이사에게 회사가 입은 손해를 되돌려 받을 수 있다는 판례가 축적된다면 이사회가 법 위반 리스크를 바라보는 방식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특히 대표이사가 "몰랐다"는 이유만으로 책임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질 경우 기업의 내부통제는 형식적인 규정 마련을 넘어 실제 작동 여부까지 점검받게 된다. 주주대표소송 활성화가 기업 지배구조의 다음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이경호 더파워 기자 lkh@thepower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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