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7년 글로벌 신차 판매 1억대·1.3% 성장…美 BEV는 87만대로 10% 감소 전망
美 BESS 설치 수요 80.6GWh로 28.7%↑…데이터센터 연계 물량 1.9→12.1GWh
국내 셀 3사 북미 ESS 수주잔고 약 200GWh…최소 2028년까지 물량 확보
유럽 BEV 423만대·20% 성장 전망…탄소규제·중국산 수입 제한이 비중국 공급망 변수
위 사진은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으로 AI(인공지능)를 활용해 생성된 가상의 이미지입니다.
[더파워 이경호 기자] 전기차가 주춤한 사이 데이터센터가 2차전지의 새로운 성장축으로 부상하고 있다. 2027년 글로벌 자동차 시장은 1%대 저성장이 예상되고 미국 전기차 판매도 오히려 감소할 전망이지만, 미국 에너지저장장치(ESS) 시장은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를 등에 업고 30% 가까이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자동차용 배터리 의존도가 높았던 국내 2차전지 업체 입장에서는 성장의 무게중심이 '전기차 판매량'에서 '전력 인프라'로 이동하는 셈이다. 특히 국내 배터리 셀 업체들이 이미 북미에서 대규모 ESS 수주잔고를 확보하고 있어 2027년부터 수주가 실제 출하와 이익으로 연결되는지가 업황 반전의 핵심 변수가 될 전망이다.
21일 대신증권의 자동차·2차전지 산업 전망에 따르면 2027년 글로벌 신차 판매량은 약 1억대로 전년 대비 1.3% 증가하는 데 그칠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은 3344만대로 1.2%, 미국은 1666만대로 0.9%, 유럽 주요국은 1000만대로 2.2% 증가할 것으로 전망돼 전체 자동차 시장의 강한 수요 회복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환경이다.
친환경차 시장도 지역별로 흐름이 크게 갈릴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 순수전기차(BEV) 판매는 1708만대로 11% 증가할 전망이지만 미국은 87만대로 오히려 10% 감소할 것으로 예상됐다. 미국에서는 신차 라인업 부족과 중고 전기차 공급 확대가 수요 회복을 제한하는 반면 하이브리드(HEV)는 충전 부담 없이 연료비를 줄일 수 있다는 장점에 힘입어 283만대로 4% 증가할 전망이다.
반면 ESS 시장의 그림은 전혀 다르다. 2027년 미국 배터리에너지저장장치(BESS) 설치 수요는 80.6GWh로 전년 대비 28.7%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설치 출력은 24.9GW로 20.2% 증가하고 평균 저장시간도 3.0시간에서 3.2시간으로 늘어나면서 실제 배터리 투입량은 설비용량 증가 속도보다 더 빠르게 늘어날 전망이다.
가장 빠르게 커지는 수요처는 데이터센터다. 데이터센터와 연계된 미국 BESS 수요는 2026년 1.9GWh에서 2027년 12.1GWh로 6배 이상 확대되고 전체 BESS 수요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3%에서 15%로 높아질 것으로 전망됐다. 신규 데이터센터 설치용량이 13GW에서 17GW로 늘어나는 동시에 데이터센터의 BESS 적용률도 4%에서 18%까지 높아질 것이라는 예상이 반영됐다.
AI 데이터센터는 일반 제조시설과 달리 24시간 안정적인 전력이 필요하다. 전력망에서 필요한 전기를 제때 공급받지 못하거나 재생에너지 발전량이 시간대별로 흔들릴 경우 대규모 배터리에 전력을 저장했다가 공급하는 ESS의 역할이 커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데이터센터 자체의 소비전력도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AI 연산에 사용되는 가속서버가 빠르게 늘면서 기존 전력망만으로 전력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워지고 있고, 발전시설과 데이터센터를 연결하는 과정에서 ESS를 함께 구축하는 프로젝트가 늘어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국내 배터리 업체에는 이미 확보한 수주잔고가 강점이다. 국내 배터리 셀 3사의 북미 ESS 수주잔고는 2025년 말 기준 약 200GWh 규모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2~3년에 걸쳐 물량이 공급되는 계약구조를 감안하면 현재 생산능력 기준으로 최소 2028년까지 상당한 물량이 확보돼 있다는 분석이다.
ESS 생산능력 확대도 진행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의 ESS 생산능력은 2025년 30GWh에서 2027년 73GWh로 확대되고, 이 가운데 북미 생산능력은 20GWh에서 62GWh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SDI 역시 전체 ESS 생산능력이 같은 기간 21GWh에서 43GWh로 증가하고 북미는 8GWh에서 30GWh 수준까지 확대될 것으로 전망됐다.
결국 2027년은 ESS 수주가 실적 숫자로 전환되는 첫해가 될 가능성이 크다. 2022년 이후 전기차 수요 둔화에 대응해 배터리 업체들이 공격적인 설비투자를 자제해 온 만큼 ESS 수요가 예상대로 증가할 경우 과잉설비 부담보다 가동률 상승에 따른 수익성 개선 효과가 먼저 나타날 수 있다.
미국 전기차 시장이 약하다고 해서 차량용 배터리 시장 전체가 꺾이는 것도 아니다. 2027년 글로벌 차량용 배터리 수요는 1492GWh로 전년 대비 약 12% 증가할 전망이며, 중국과 유럽이 성장을 이끌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유럽의 차량용 배터리 수요는 326GWh로 16% 늘어날 전망이다. 유럽 BEV 판매량도 423만대로 20% 증가하고 침투율은 30%까지 높아질 것으로 예상돼 미국과는 다른 흐름이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유럽에서는 규제 변화도 전기차 판매 확대를 압박하고 있다. 2025~2027년 평균으로 적용되는 탄소배출 규제의 정산 시점이 다가오면서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완성차 업체들은 전기차 판매를 더 늘리거나 크레딧을 구매해야 한다.
중국산 하이브리드와 플러그인하이브리드에 대한 수입 제한 논의도 변수다. 현재 논의되는 방안이 현실화할 경우 2027년 중국산 PHEV·HEV 물량에 연간 35만대 수준의 초기 쿼터가 적용될 수 있어 중국 업체의 유럽 판매 증가 속도가 둔화될 가능성이 있다. 다만 구체적인 법적 시행 방식과 국가별 배분 기준은 아직 최종 확정 전인 만큼 실제 효과는 향후 제도 설계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 경우 유럽 현지 생산기반을 갖춘 완성차와 배터리 공급망의 가치가 높아질 수 있다. 유럽 내에서 전기차를 생산하는 완성차 업체가 탄소배출 규제를 맞추기 위해 판매를 늘리고, 역내 조달 요건까지 강화될 경우 현지 생산능력을 확보한 비중국 배터리 업체가 상대적으로 유리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배터리 소재 업체에는 2027년 상반기까지 부담이 남아 있다. 올해 상반기 상승했던 리튬과 니켈, 코발트, 망간 가격이 고점 대비 각각 약 28%, 24%, 9%, 5% 하락하면서 판매가격 하락이 고가 재고 투입보다 먼저 반영되는 '역래깅'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셀 업체는 ESS 출하 확대를 통해 가동률을 높일 수 있지만 소재 업체는 출하량이 회복되더라도 판가 하락과 기존 고가 재고 부담을 동시에 받을 수 있다는 의미다. 이에 따라 2027년 초반에는 소재 업체보다 실제 ESS 수주잔고와 생산능력을 확보한 셀 업체의 실적 가시성이 상대적으로 높을 가능성이 있다.
2027년 2차전지 업황을 전기차 판매량 하나만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이유다. 미국에서는 BEV가 감소하는 대신 ESS가 급성장하고, 유럽에서는 전기차 규제와 현지화 정책이 판매 확대를 압박하면서 지역과 용도에 따라 전혀 다른 시장이 만들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국내 배터리 업체의 반등 여부도 '전기차가 언제 다시 잘 팔리느냐'보다 이미 확보한 북미 ESS 물량을 얼마나 빠르게 매출과 이익으로 바꾸느냐에 달릴 가능성이 커졌다. 자동차 배터리에서 시작된 국내 2차전지 산업의 다음 성장축이 AI 데이터센터와 전력망으로 이동하는 2027년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