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범정부 ‘자원안보 기본계획’ 확정…2026~2035년 중장기 로드맵
2030년까지 석유 비축시설 2000만배럴 추가…콘덴세이트도 확보
핵심광물 38종→51종·비축품목 24종→29종…최대 365일분 비축
자원안보기금 신설 추진…2035년 전문인력 3000명·협력국 15개 확보
자원안보협의회 주재하는 김정관 장관/연합뉴스
[더파워 한승호 기자] 정부가 현재 약 70%에 달하는 중동산 원유 의존도를 2035년까지 50% 이하로 낮춘다. 중동 정세와 주요 해상운송로 차질에 대비해 2030년까지 2000만배럴 규모의 석유 비축시설을 추가하고, 반도체·배터리 등에 필요한 핵심광물 관리 대상도 38종에서 51종으로 확대한다.
산업통상부는 23일 김정관 장관 주재로 무역보험공사에서 ‘제6차 자원안보협의회’를 열고 ‘제1차 자원안보 기본계획’, ‘제5차 석유비축계획 조정안’, ‘핵심광물 지정계획’, ‘제1차 핵심광물 비축계획’ 등 4개 안건을 심의·확정했다고 밝혔다.
이번 기본계획은 지난해 2월 ‘국가자원안보 특별법’ 시행 이후 처음 마련된 범정부 차원의 자원안보 중장기 계획이다. 계획 기간은 2026년부터 2035년까지 10년으로, 정부는 앞으로 5년마다 기본계획을 수립한다.
정부가 첫 법정 기본계획까지 마련한 배경에는 최근 잇따른 글로벌 공급망 충격이 있다.
코로나19에 따른 물류 차질과 미·중 전략경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어 중동 전쟁까지 겹치면서 원유와 가스, 핵심광물 공급이 국가 경제와 산업 전체를 흔들 수 있다는 판단이다.
정부는 특히 중동 전쟁을 통해 특정 국가와 지역, 운송로에 집중된 공급망이 에너지 문제를 넘어 산업·경제와 국가안보 전반으로 확산할 수 있다는 점이 확인됐다고 진단했다. 기존의 ‘적기 공급(Just-in-Time)’ 중심 체계를 ‘만약의 사태에 대비(Just-in-Case)’하는 구조로 전환하기로 한 이유다.
가장 먼저 손보는 것은 원유 공급망이다. 2025년 기준 국내 원유 수입의 중동 의존도는 약 70%에 달한다. 특히 전체 원유 도입 물량 가운데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비중은 61%로, 중동 지역이나 주요 해상운송로에 문제가 발생하면 국내 수급도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구조다.
정부는 2035년까지 비중동산 원유 비중을 50%까지 끌어올려 중동 의존도를 절반 이하로 낮출 계획이다. 천연가스도 특정 국가 의존도를 30%대 미만으로 관리한다.
원유 수입선을 다변화하는 기업에 대한 지원도 확대한다. 현재 25% 수준인 운임차액 지원을 확대하고 다변화 원유 도입 실적에 따라 지원을 차등화한다.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국 원유의 직접운송 확인 특례와 원산지 증명 간소화 등 관세행정 편의도 제공한다.
현물구매 중심인 다변화 원유 도입 방식은 장기계약으로 넓힌다. 생산국 정부와 정부 간 협력(G2G)을 통해 장기계약 물량 확보를 지원하고, 해외 자원개발에서는 제한적인 지분 투자와 도입계약을 결합해 국내로 들어올 자원을 미리 확보한다.
천연가스 역시 중장기 계약을 확대하고 유가뿐 아니라 미국 천연가스 가격인 헨리허브(HH) 등 다양한 가격지수를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한다.
국내 자원개발은 시장원칙과 민간 참여를 중심으로 추진한다. 정부는 국내 자원개발을 주권적 권리 차원에서 접근하되 향후 프로젝트에는 민간기업이 참여하는 것을 원칙으로 정했다.
원유 종류가 달라져도 국내 정유사가 처리할 수 있도록 정제설비와 기술도 바꾼다. 정제설비 전환·개선에 필요한 시설투자와 다유종 처리 기술을 위한 연구개발(R&D)을 지원할 계획이다.
비축능력도 대폭 확충한다. 정부는 2030년까지 2000만배럴 규모의 석유 비축시설을 추가로 건설하기로 했다. 제4차 석유비축계획이 종료된 이후 별도의 시설 증설이 없었던 만큼 중동 전쟁 이후 커진 공급망 불확실성에 대응해 저장능력을 먼저 키우겠다는 것이다.
이번 증설은 하루 원유 수요량 약 280만배럴을 기준으로 60일분을 저장할 수 있는 시설 확보를 목표로 추진된다. 늘어난 저장공간에는 정부 비축유뿐 아니라 산유국과의 국제공동비축 물량도 확보한다.
비축 대상도 기존 원유와 연료유 중심에서 넓힌다. 석유화학산업의 원료 수급까지 고려해 비상시 나프타를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도록 콘덴세이트를 추가로 확보한다. 국가별 맞춤형 원유 스왑과 인접국 비축시설 상호 활용 등 국제공조도 추진한다.
첨단산업에 필요한 핵심광물은 관리 범위 자체를 넓힌다. 정부는 공급 리스크와 산업적 중요도를 평가해 기존 38종이던 핵심광물을 51종으로 확대한다. 새로 추가되는 광물은 희토류 10종과 인, 형석, 게르마늄 등 모두 13종이다. 신규 희토류는 프라세오디뮴·프로메튬·사마륨·유로퓸·가돌리늄·홀뮴·어븀·톨륨·이터븀·루테튬이다.
인은 에너지저장장치(ESS)용 배터리 양극재와 반도체 식각용 인산 등에 사용된다. 형석은 반도체용 무수불산과 이차전지 전해액의 필수 원료이며 게르마늄은 방산용 열영상장비와 통신용 광섬유·광케이블 등에 활용된다.
핵심광물 비축도 확대한다. 정부는 비축 대상 광물을 기존 24종에서 29종으로 늘리고 공급망 위험도가 높은 주요 광물의 비축 목표를 기존 180일분에서 최대 365일분으로 상향한다. 첨단산업 수요와 국내 정·제련 기반을 고려해 고순도 금속과 산화물, 수산화물 등으로 비축 형태도 다양화한다.
공공이 보유한 물량만 계산하던 비축 개념도 바뀐다. 정부는 공공 비축과 민간 등록재고, 재자원화 원료, 해외 재고접근권 등을 모두 합친 ‘국가총가용재고’ 개념을 새롭게 도입한다. 위기 상황이 발생했을 때 실제 국내 산업에 투입할 수 있는 전체 광물 규모를 파악해 대응하겠다는 것이다.
민간기업이 보유한 재고의 국내 공급을 위한 협력망을 구축하고 폐배터리 등에서 회수한 재자원화 원료를 공공이 직접 구매해 비축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자원 보유국과 공동구매·공동보관 등 해외 공동비축 모델도 발굴한다.
해외 광산 확보까지 이어지는 ‘공급망 사다리’도 구축한다. 정부는 핵심광물 확보 방식을 시장구매에서 오프테이크 계약, 지분투자, 광산 확보·합작투자(JV) 순으로 단계화하고 민간기업의 사업 구체성과 실행력, 국내 공급망 기여도에 따라 맞춤형 지원을 제공한다.
해외자원개발 융자와 다자개발은행, 국가 간 경제·산업공동위원회 등을 활용해 민간이 자원 공급망의 상류 단계로 진출하도록 지원한다.
국내 비축기지도 늘린다. 새만금에는 핵심광물 전용 비축기지를 2028년까지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올해 실시설계를 마칠 예정이다. 광물별 공급망 병목 위험을 상시 점검하는 분석·관리 시스템도 구축한다.
버려지는 자원을 다시 공급망에 투입하는 재자원화도 주요 축으로 키운다. 정부는 2035년까지 재자원화 기업 20개를 육성한다. 폐영구자석 처리설비를 2031년까지 구축하고 재자원화 제품 자체를 비축하는 한편 2027년부터 관련 공정·설비 R&D도 지원한다.
재자원화 원료가 해외로 빠져나가는 실태를 파악하고 수거체계를 개선하는 한편 관련 기업의 산업단지 입주와 생태계 조성을 막는 규제도 손질한다. 관리 대상은 석유·가스·광물에서 수소와 희가스 등 새로운 자원으로도 확대된다.
청정·자연수소 생산기술을 확보하고 국내 생산과 저장·운송 인프라를 지원한다. 헬륨은 국제협력과 액화플랜트 내 추출설비 투자를 통해 물량을 확보하고 네온·제논 등 핵심 희가스는 국내 자립기반과 관련 기업을 육성한다.
석유화학 원료 공급망도 별도로 관리한다. 국내 석유화학 설비를 개선해 원료 공급선을 다변화하고 에탄 등 새로운 대체 원료를 들여올 수 있도록 항만과 터미널, 저장탱크 등 기반시설을 구축한다. 특정 국가 의존도가 높은 산업·에너지 소재와 부품은 대체 수입처 발굴과 대체 소재 개발, 국내 생산기반 확충을 지원한다.
장기간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자원안보 사업을 뒷받침하기 위한 전용 기금도 추진한다. 정부는 ‘자원안보기금’을 신설해 관련 세입·세출을 재구성하고 핵심광물 확보와 석유·핵심광물 비축, R&D, 전문인력 양성 등 장기 프로젝트의 재원으로 활용할 방침이다.
자원 공기업의 역할과 구조도 손본다. 정부는 원유와 가스에 대한 중복투자를 막고 국제 협상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자원 공기업 거버넌스의 근본적인 개편을 추진한다. 과거 공기업 부실을 불렀던 해외 자원개발은 자원안보 목적에 맞는 투자에 집중하고 비축 등 본연의 기능은 강화한다.
광물 분야에서는 정부 간 협력과 민관 공동투자 등 공공의 역할을 확대하되 조직혁신과 자구노력을 전제로 재정 건전화 등 정상화 방안을 검토한다.
인력과 기술 확보도 장기 과제로 설정했다. 정부는 2035년까지 자원안보 전문인력을 누적 3000명 양성한다. 전통적인 탐사·개발뿐 아니라 공급망과 트레이딩, 인공지능(AI), 국제협상 등을 함께 이해하는 융합형 인재를 키우고 AI 기반 학습과 공급망 시뮬레이션 플랫폼도 활용한다.
자원과 연계된 핵심기술의 해외 유출 방지도 강화한다. 기술·시장 분석을 통해 첨단시장 선점과 고부가 전환, 탄소중립 규제 대응, 핵심광물 공급망 확보 등 4대 핵심 도전기술을 선정해 투자하고, 불법 수출과 핵심기술 유출에 대한 관리·제재도 강화한다.
해외에서는 2035년까지 자원안보 전주기 협력 파트너 15개국을 확보한다. 자원 보유국의 수요와 한국의 광물 탐사·정제기술, 원유 정제능력 등을 묶은 패키지형 협력을 확대하고 무역협정을 활용한 자원 협력과 무관세 도입 체계도 추진한다.
위기가 발생했을 때 대응 속도도 높인다. 정부는 범부처·산업공급망 조기경보시스템(EWS)과 연결되는 자원 전용 EWS를 신설해 위기 상황 발생 즉시 ‘D+0’ 체계를 가동한다. 기관별로 흩어진 정보를 한데 모은 통합 데이터 시스템도 구축한다.
원유·가스·광물 등 자원별 위기대응 모의훈련은 매년 실시한다. 실제 위기가 발생하면 민간 재고를 우선 활용하고 정부 비축분 방출은 최대한 뒤로 미뤄 비상대응 여력을 확보한다.
해외에서 생산한 물량을 국내로 들여오도록 하는 반입명령도 위기 발생 즉시 발동 준비에 들어가고 상황이 악화하면 본격 시행하도록 절차를 정비한다. AI를 활용해 자원 구매와 비축, 방출까지 전 과정을 최적화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김 장관은 “중동 전쟁을 겪으며 자원안보는 단순히 값싼 원료를 확보하는 비용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생활과 산업을 지키는 국가 생존의 문제라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에 처음 수립한 자원안보 기본계획은 위기 때마다 단기적·사후적 대응에서 벗어나 우리 자원 공급망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장기 로드맵”이라며 “자원안보협의회를 중심으로 관계부처와 공공기관, 민간기업의 역량을 결집해 장기적인 관점에서 자원안보 과제를 꾸준히 추진해 나가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