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AI 데이터센터·피지컬 AI에 향후 10년간 1600조원 규모 투자
메모리 우위에서 첨단패키징·전력·연산·제조데이터로 경쟁력 확장
미·중식 전 영역 자립 아닌 ‘특화형 풀스택’으로 글로벌 AI 생태계 공략
7개 권역 성장엔진과 연결해 대형투자를 국가 산업전환 플랫폼으로 키워야
위 사진은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으로 AI(인공지능)를 활용해 생성된 가상의 이미지입니다.
[더파워 한승호 기자] 인공지능(AI) 패권 경쟁의 승부처가 달라지고 있다. GPU와 HBM을 얼마나 많이 확보하느냐의 경쟁을 넘어 첨단패키징, 전력망과 변압기, 냉각설비, 연산능력, 제조 현장의 실제 데이터와 로봇 정밀부품까지 곳곳에서 병목이 발생하면서다.
한국이 향후 10년간 1600조원 안팎을 투입하는 반도체·AI 데이터센터·피지컬 AI ‘3대 메가 프로젝트’도 이 같은 변화에 맞춰져 있다. 미국이나 중국처럼 AI 생태계의 모든 영역을 자국 안에 구축하는 방식이 아니라 한국이 이미 경쟁력을 가진 메모리와 제조업을 출발점으로 글로벌 AI 산업의 결정적인 병목을 차례로 선점하는 전략이다.
첫 번째 축은 반도체다. 정부 계획에는 향후 5년 안에 HBM과 D램 등 메모리반도체 생산능력을 2배로 확대하고, 서남권 신규 반도체 팹과 충청권 첨단패키징 거점, 동남권 소재·부품·장비 기반을 구축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여기서 중요한 변화는 AI 반도체의 병목이 이미 GPU와 HBM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AI 가속기와 고대역폭메모리가 빠르게 늘어나면서 이를 하나의 고성능 반도체로 묶는 첨단패키징 역량이 새로운 제약 요인으로 떠오르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TSMC가 공급하는 CoWoS 패키징 물량이 2027년까지 사실상 채워진 상태이고, 미국 애리조나에 건설되는 신규 패키징 공장도 2029년에야 가동될 예정이다.
결국 한국이 메모리 생산만 늘리는 데 머물 경우 HBM 경쟁력을 갖고도 글로벌 AI 공급망의 주도권을 다른 기업에 내줄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다. 메모리에서 확보한 우위를 첨단패키징과 소부장으로 확장해 반도체 공급망의 더 넓은 구간을 차지해야 하는 이유다.
두 번째 병목은 AI 데이터센터다. 1단계로 2029년까지 8.4GW 규모의 AI 데이터센터를 구축하고 투자 유치를 포함해 약 550조원을 투입한다는 계획이 잡혀 있지만, 데이터센터 경쟁의 핵심도 서버 숫자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AI 반도체 공급 부족이 일부 완화되면서 이번에는 변전소와 전력망, 변압기, 냉각설비가 새로운 제약 요인으로 부상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2025년 말 기준 2061GW 규모의 발전·저장 프로젝트가 전력망 연결을 기다리고 있으며 신청부터 상업운전까지 평균 5년 이상이 걸리는 상황이다.
최근 국내 전력기기 업체들이 생산능력을 빠르게 늘리고 있는 흐름도 이 지점과 맞닿아 있다. AI 데이터센터가 늘어날수록 필요한 것은 GPU뿐 아니라 변압기와 전력망, 냉각설비, 안정적인 전력 공급체계이며 한국은 반도체뿐 아니라 이 같은 하드웨어 공급망에서도 경쟁력을 확보할 여지가 있다.
AI 모델 경쟁 역시 연산능력과 연결된다. 고성능 모델을 개발하더라도 대규모 학습과 추론을 감당할 컴퓨팅 인프라가 부족하면 실제 서비스와 산업 적용에는 한계가 생긴다. 8.4GW 규모 데이터센터 구축은 단순한 부동산·인프라 투자가 아니라 국가 차원의 AI 연산력을 확보하는 산업전략으로 볼 필요가 있다.
세 번째 축인 피지컬 AI에서는 경쟁 조건이 더 달라진다. 인터넷에 축적된 텍스트와 이미지를 학습할 수 있는 생성형 AI와 달리 로봇과 자율기기에는 실제 공장에서 사람이 움직이고 물건을 집고 설비를 조작하는 과정에서 생성되는 고품질 ‘리얼월드 데이터’가 필요하다.
정밀한 움직임을 구현할 액추에이터와 감속기 같은 부품도 핵심이다. 배터리 구동시간, 손가락 수준의 정밀 조작, 전신 제어, 가상환경에서 학습한 기술을 실제 세계로 옮기는 ‘Sim-to-Real’ 능력이 피지컬 AI 경쟁력을 결정한다.
한국이 제조업을 전략자산으로 활용할 수 있는 대목도 여기에 있다. 반도체와 자동차, 배터리, 조선, 기계 등 대규모 제조현장이 존재한다는 것은 로봇과 제조 AI를 실제 생산환경에서 시험하고 데이터를 축적할 수 있는 기반을 갖고 있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3대 메가 프로젝트를 각각 떨어진 대형 투자사업으로 봐서는 효과가 제한될 수 있다. 메모리와 첨단패키징에서 시작해 AI 데이터센터와 국가 연산 인프라를 거치고, 제조현장에서 데이터를 쌓아 피지컬 AI로 이어지는 하나의 ‘AI 회랑’으로 연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과 중국이 추진하는 AI 풀스택 전략과도 차이가 있다. 미국은 첨단 반도체와 AI 가속기, 데이터센터, 프런티어 모델에 막대한 자본을 투입하고 있고 중국은 반도체 국산화와 대규모 컴퓨팅 인프라, 로봇 부품과 제조 기반을 결합하며 자체 생태계 구축에 나서고 있다.
한국이 이들과 같은 규모로 모든 영역에서 경쟁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대신 메모리와 첨단패키징, 전력기기, 제조 데이터, 로봇 하드웨어처럼 상대적으로 강점을 가질 수 있는 구간을 연결해 쉽게 대체하기 어려운 공급국가가 되는 ‘특화형 풀스택’이 현실적인 전략으로 제시된다.
1600조원의 투자가 실제 산업 경쟁력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지역 산업과의 연결도 중요하다. 중부권은 AI 핵심부품과 첨단산업의 스케일업 허브, 강원권은 의료·바이오 특화 에지 AI, 전북은 로봇 파운드리와 농업 피지컬 AI 플랫폼으로 역할을 나눌 수 있다.
대경권은 피지컬 AI 핵심부품과 로봇 공급망, 동남권은 조선·모빌리티·제조업을 활용한 제조 AI와 피지컬 AI 실증 거점으로 연결된다. 서남권은 AI 컴퓨팅과 에너지 AI 산업의 핵심 거점, 제주권은 재생에너지 기반 미래 에너지 AI 테스트베드로 육성하는 구상이다.
결국 메가 프로젝트의 성패는 얼마를 투자하느냐보다 투자가 어디로 연결되느냐에 달려 있다. 반도체 공장을 늘리고 데이터센터를 짓고 휴머노이드를 생산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발생하는 기술과 수요를 전국의 기존 산업으로 확산해야 한다.
‘메가 프로젝트 투자→지역 산업생태계 성장→권역 간 분업→국가 산업 경쟁력 강화’로 이어지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1600조원이 일회성 설비투자를 넘어 한국 제조업 전체를 AI 산업으로 전환하는 플랫폼이 될 수 있다.
한국의 AI 전략은 미국과 중국을 그대로 따라가는 경쟁이 아니다. 이미 가진 메모리와 제조 경쟁력을 출발점으로 세계 AI 산업이 가장 부족해하는 패키징과 전력, 연산 인프라, 실제 제조 데이터와 정밀 하드웨어를 하나의 회랑으로 연결하는 것이 핵심이다.
1600조원이라는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연결고리다. AI 생태계의 모든 것을 갖지 못하더라도 누구도 쉽게 우회할 수 없는 병목을 쥔다면, 한국은 글로벌 AI 경쟁에서 단순한 수요국이 아니라 핵심 공급국으로 자리를 만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