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파워 이설아 기자] KT 경영 공백이 장기화하면서 김영섭 대표이사의 책임론이 거세지고 있다. 해킹 사태 당시 “총체적 책임을 지겠다”고 약속했던 김 대표가 3월 주주총회까지 자리를 지키며 인사와 조직 개편을 사실상 멈춰 세우고 있다는 비판이 29일 재계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김 대표는 지난해 국정감사장에서 KT 해킹 피해와 관련해 고개를 숙이며 책임을 강조했지만, 현재는 “법적으로 보장된 임기(3월 말)까지 권한을 행사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차기 CEO 내정자인 박윤영 전 사장과의 인수인계는커녕 필수적인 조직 개편과 임원 인사까지 미루면서, 해킹 사태 수습과 신뢰 회복을 위한 ‘골든타임’을 스스로 갉아먹고 있다는 지적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연임 포기를 선언한 CEO가 후임자의 조기 안착을 위해 길을 터주는 것이 통상적인 관행인데, 지금 모습은 책임 이행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권한을 놓지 않으려는 몽니로 비친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KT 이사회가 만들어 놓은 제도적 장치도 역설적으로 ‘경영 마비’의 빌미가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KT 이사회는 지난해 말 CEO의 인사 권한을 이사회 통제 범위에 넣는 규정 개정을 단행했다. 표면적으로는 지배구조 투명성 강화를 위한 조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임기 말 현직 CEO가 인사를 하지 않으면 차기 내정자도 손을 쓸 수 없는 구조를 고착화했다는 것이다.
황용식 세종대 교수는 “인수인계 시점에 CEO와 후임자 간 소통이 단절된 것은 차기 경영진에게 부담과 리스크를 떠넘기는 행위”라며 “소유가 분산된 기업에서 이사회와 CEO 견제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전형적인 사례”라고 지적했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김 대표 선임 당시로 돌아가고 있다. 2023년 8월 김 대표가 KT 수장으로 낙점될 때부터 ‘낙하산 인사’ 논란이 제기됐고, 최근에는 2차 종합 특검 출범과 맞물려 윤석열 정부 핵심 인사와 비선 실세의 개입 의혹까지 불거지고 있어서다. 당시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은 구현모 전 대표의 연임에는 “소유분산기업 지배구조 투명성”을 내세워 강하게 제동을 걸었지만, LG CNS 대표 시절 시스템 개발 실패 전력이 거론됐던 김영섭 후보에 대해선 별다른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이사회가 대표이사 자격 요건에서 ‘정보통신 전문성’ 항목을 삭제한 결정, 대통령실 핵심 인사와 이른바 ‘건진법사’ 등 비선 인사들이 KT CEO 인선 과정에 관여했다는 증언도 2차 특검의 주요 수사 대상으로 지목되고 있다. 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장은 “KT CEO 인선은 정권 차원의 불법적 개입과 이권 거래 의혹이 복합적으로 얽힌 사안”이라며 “비전문가 낙하산 인사가 어떻게 회사 전체의 리스크로 확산됐는지 규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주인 없는 회사의 구조적 취약점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사례”로 본다. 소유가 분산된 KT에서 이사회는 정권 입맛에 맞는 인사가 들어올 수 있도록 빗장을 풀어줬고, 그렇게 선임된 CEO는 해킹 사태와 고객 이탈, 신뢰 추락 앞에서 전문성 부족과 책임 회피로 일관했다는 것이다. 오는 3월 박윤영 내정자가 공식 취임하면 KT는 거버넌스 복원과 대규모 고객 이탈 수습, 2차 특검을 통해 드러날 가능성이 있는 과거 의사결정 과정의 책임 정리까지 동시에 풀어야 하는 과제를 떠안게 된다. “책임지겠다”던 말 대신 혼란만 남긴 김영섭 대표의 퇴장은 KT가 향후 어떤 방식으로 지배구조를 재설계해야 하는지에 대한 뼈아픈 교훈으로 남을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