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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특집 비평 : 금보성비엔날레] 시장의 미술을 넘어 도시의 언어를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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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특집 비평 : 금보성비엔날레] 시장의 미술을 넘어 도시의 언어를 만들다

최성민 기자

기사입력 : 2026-08-27 11:05

사진제공=송림아트센터
사진제공=송림아트센터
-한글에서 나주까지

오늘날 현대미술을 움직이는 힘을 크게 나눈다면 시장과 담론이라는 두 개의 축을 생각할 수 있다.

키아프(KIAF), 아트바젤(Art Basel), 아트바젤 홍콩, 프리즈(Frieze), 뱅크아트페어, 조형아트서울과 같은 아트페어는 갤러리와 작가, 컬렉터와 작품을 연결한다. 작품은 거래되고 작가는 발견되며, 컬렉팅과 유통을 통해 미술시장이 확장된다.

이것은 현대미술 생태계에서 반드시 필요한 기능이다. 그러나 미술에는 시장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시간이 있다. 오늘 얼마에 팔렸는가가 아니라 수십 년 뒤 무엇으로 기억될 것인가를 묻는 시간이다.
그 시간을 담당해야 하는 대표적인 제도가 비엔날레다. 따라서 아트페어가 “무엇이 거래되는가”를 보여준다면 비엔날레는 “우리 시대의 미술은 무엇을 질문해야 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금보성비엔날레를 바라봐야 할 출발점도 여기에 있다.

-비엔날레가 많아졌지만 왜 기억되는 작품은 적은가

한국에는 수많은 비엔날레가 있다. 국제비엔날레와 지역비엔날레가 열리고 수십 개국에서 수많은 작가가 초대된다. 대형 전시장과 상당한 예산이 투입되고 총감독과 큐레이터가 선정되며 개막식과 국제행사가 이어진다. 그러나 냉정한 질문 하나를 던질 필요가 있다. 그 많은 비엔날레에서 대중은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가.
몇 개국이 참여했는가.
몇 명의 작가가 초대되었는가.
몇 점의 작품이 전시되었는가.
이러한 숫자는 행정적인 성과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숫자가 미술사의 기억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수백 명의 작가가 참여하면서 한 명의 작가도 제대로 기억되지 않는 역설이 발생할 수 있다.
전시가 거대해질수록 메시지는 분산되고, 작품보다 행사 자체가 앞서며, 총감독과 큐레이터의 거대한 담론 속에서 개별 작품이 하나의 사례로 소비될 위험도 있다. 비엔날레가 단순한 대형 단체전과 달라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비엔날레의 규모는 참여작가의 숫자가 아니라 그 시대에 얼마나 강력한 질문을 만들어냈는가로 평가되어야 한다.

-미술관의 작은 개인전이 거대한 비엔날레보다 오래 기억되는 이유

흥미로운 것은 때로 규모가 작은 미술관 개인전이나 상업화랑 기획전이 거대한 비엔날레보다 오래 기억된다는 사실이다.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작가가 있고, 하나의 세계가 있으며, 대표작이 있다. 포스터와 보도자료, 전시장과 도록, 작가노트와 도슨트가 하나의 언어를 반복한다.
관람객은 전시장을 나서면서 적어도 하나의 이미지와 한 작가의 이름을 가지고 돌아간다.
반대로 수백 명의 작가가 참여하는 비엔날레에서는 모든 작가를 보여주려다 아무도 기억시키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개국 ○백 명 참가’라는 숫자는 행사를 설명하지만 작품을 설명하지 않는다. 대중은 숫자를 기억하지 않는다. 대중은 이미지와 이야기와 경험을 기억한다.
따라서 좋은 비엔날레에는 반드시 하나의 ‘대표 기억’이 필요하다.
다시 보고 싶은 작품 하나. 논쟁을 일으킨 질문 하나.
그 도시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공간 하나.
그리고 전시가 끝난 뒤에도 다시 찾아보게 만드는 기록 하나.
이것이 없다면 전시는 폐막과 함께 사라진다.

-금보성비엔날레는 반대 방향을 선택했다

금보성비엔날레의 실험은 이 지점에서 기존 비엔날레와 다른 방향을 선택한다. 많은 작가를 모아 하나의 거대한 전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한 작가의 작업을 장기간 추적한다. 확장보다 집중이다.
다양성보다 하나의 언어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방식이다. 그 중심에는 한글이 있다. 그러나 한글을 작품에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 이 전시가 중요해지는 것은 아니다. 한글은 이미 서예와 디자인, 타이포그래피와 문자추상, 현대회화에서 수없이 사용되어 왔다.

따라서 질문은 ‘한글을 그렸는가’가 아니다.
한글로 이전에 없었던 회화의 구조를 만들어냈는가.
금보성비엔날레가 미술사적 의미를 가지려면 바로 이 질문을 통과해야 한다.

-읽는 한글을 해체하고 보는 한글을 만든다

금보성의 작업에서 한글은 단어를 전달하기 위한 기호에서 출발하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자음을 해체하고 획을 분리한다. ㄱ·ㄴ·ㅁ·ㅇ·ㅎ은 단어를 구성해야 한다는 언어적 의무에서 잠시 벗어난다. 분리된 획은 선이 된다. 선은 면을 만들고, 면은 색을 만나며, 색은 화면의 리듬과 공간을 형성한다.

문자 → 획 → 선 → 면 → 색 → 회화 → 공간.
이것이 금보성이 말하는 ‘봉인된 자음을 해제한다’는 개념의 미학적 핵심이다.
한글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한글에게 다른 가능성을 허용하는 것이다. 읽어야 했던 문자를 보게 하고, 뜻을 전달해야 했던 글자를 감각하게 한다.
그래서 금보성의 한글 앞에서는 한국인에게도 낯선 경험이 발생한다. 분명 한글인데 읽을 수 없다.
그 순간 문자는 의미 전달을 중단하고 이미지가 된다.
이 지점은 중요하다. 읽지 못한다는 것이 실패가 아니라 회화가 시작되는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읽지 못하는 한글을 외국인은 어떻게 볼 것인가

여기에서 한글회화의 세계성에 대한 중요한 질문이 발생한다. 한국어를 모르는 외국인은 한글을 읽지 못한다. 그렇다면 오히려 그는 처음부터 한글을 이미지로 볼 가능성이 있다. 한국인은 글자를 보면 먼저 읽으려 하지만 외국인은 선과 형태를 먼저 본다. 따라서 금보성 한글회화가 세계미술에서 검증되어야 할 기준은 의외로 분명하다. 한글에 대한 설명을 제거해도 작품이 성립하는가.

세종대왕과 훈민정음의 역사를 몰라도 화면이 시각적으로 작동하는가. ㄱ과 ㅁ과 ㅇ의 뜻을 몰라도 선과 면, 색과 리듬, 반복과 균열을 경험할 수 있는가.
가능하다면 한글은 한국어라는 언어적 경계를 넘어선다. 그때 한글은 ‘한국을 설명하기 위한 문자’가 아니라 세계인이 볼 수 있는 하나의 조형언어가 된다.
한글의 세계화가 반드시 세계 사람들에게 한글을 읽게 만드는 것만을 의미할 필요는 없다. 한글을 보게 만드는 것도 또 하나의 세계화일 수 있다.

-미술재료를 다시 묻는 이유

금보성비엔날레에서 또 하나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미술재료다. 현대미술시장에서 작품은 대부분 완성된 상태로 등장한다. 아트페어의 부스에 걸린 작품에서 관람객은 그 작품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충분히 볼 수 없다. 그러나 작가에게 작품은 결과 이전에 과정이다.

캔버스와 천, 인견과 한지, 아크릴물감과 안료, 젯소와 바인더, 미디엄과 바니시, 붓과 나이프, 롤러와 마스킹테이프. 그리고 칠하고, 말리고, 다시 덮고, 떼어내고, 샌딩하고, 다시 칠하는 시간. 이 모든 것이 회화를 만든다. 따라서 재료는 작품 뒤에 숨은 기술이 아니다. 재료 역시 미학이다.

작가가 어떤 천을 선택하고, 어떤 안료를 사용하며, 몇 번을 건조시키고, 어떤 방식으로 표면을 갈라지게 만드는가는 작품의 시각적 결과뿐 아니라 수십 년 후의 보존까지 결정한다. 한국 현대미술이 세계미술사의 한 축을 목표로 한다면 작품의 이미지뿐 아니라 재료의 지속성, 제작기법, 보존과 복원에 관한 연구도 함께 축적되어야 한다.
미술사는 작품의 철학만 보존하는 것이 아니다.
그 철학을 담고 있는 물질도 보존한다.

-크랙, 물질의 균열과 언어의 균열

금보성의 작업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크랙이다.
균열은 흔히 실패로 여겨진다. 화면이 갈라지고 표면이 깨지는 것은 전통적인 회화 제작에서 피해야 할 현상일 수 있다. 그러나 금보성은 그 실패의 흔적을 다시 조형언어로 가져온다. 갈라진 틈은 또 하나의 선이 된다. 통제해서 만든 선과 물질이 스스로 만들어낸 선이 한 화면에서 만난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대응관계가 발생한다. 자음을 해체하는 것이 언어의 균열이라면 크랙은 물질의 균열이다.
완성된 문자를 갈라 그 내부에서 새로운 형태를 발견하고, 완성된 표면을 갈라 그 안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선을 발견한다. 따라서 균열은 파괴의 흔적만이 아니다.새로운 구조가 발생하는 장소다.
금보성의 한글미학이 단순한 문자 디자인과 구별되어야 한다면 바로 이러한 물질적 사고까지 함께 검증되어야 한다.

사진제공=송림아트센터
사진제공=송림아트센터

-아트페어와 비엔날레는 적이 아니다

여기에서 오해해서는 안 된다.
금보성비엔날레가 아트페어를 부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키아프, 프리즈, 아트바젤, 아트바젤 홍콩, 뱅크아트페어, 조형아트서울은 각각 미술시장에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작가에게 작품을 판매할 시장이 필요하고 갤러리에는 컬렉터가 필요하다.
미술시장 없는 현대미술 역시 현실적으로 존재하기 어렵다. 문제는 모든 미술의 가치가 시장의 언어로만 환산되는 순간이다.
잘 팔리는 작품과 중요한 작품은 반드시 같은 것이 아니다. 비싼 작품과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작품 역시 언제나 일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미술생태계에는 서로 다른 시간이 필요하다.
아트페어에는 거래의 시간이 있고, 미술관에는 보존의 시간이 있으며, 레지던시에는 창작의 시간이 있고, 비평에는 검증의 시간이 있으며, 비엔날레에는 질문의 시간이 있어야 한다.
금보성비엔날레가 아트페어와 달라야 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왜 나주시인가

금보성비엔날레를 작품만으로 읽으면 절반밖에 보지 못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작품은 나주라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미술시장은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다.
바젤, 홍콩, 런던, 뉴욕, 서울.
갤러리와 컬렉터, 미술관과 언론, 자본과 관광이 모이는 곳에서 대규모 문화행사가 만들어진다.
그런데 금보성비엔날레는 나주로 향했다.
이것은 단순히 서울에서 지방으로 내려간 것이 아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발생시킨다.
세계적인 현대미술은 반드시 세계적인 대도시에서 시작되어야 하는가.
나는 이 질문이 금보성비엔날레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문화의 중심은 행정적으로 지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곳에서 무엇을 경험하고 기억하는가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나주시의 역사가 현대미술과 만나는 방식

나주는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다.
그러나 오래된 역사를 가졌다는 사실과 현대적인 문화도시가 된다는 것은 같은 문제가 아니다. 역사는 보존해야 하지만 동시에 현재의 언어로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
금보성비엔날레는 바로 이 지점에서 한글을 매개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할 가능성을 가진다. 한글이라는 문화유산을 단순히 보존하거나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회화로 전환하고, 그것을 다시 나주의 공간 속에서 경험하게 한다. 송림마을과 송림아트센터, 나주미술관, 레지던시, 주변의 카페와 마을길, 지역 주민의 생활공간까지 전시와 연결될 수 있다.
그때 관람객은 작품만 보는 것이 아니다.
나주에 와야 하고, 나주를 지나야 하며, 나주의 풍경과 사람을 만나야 한다. 결국 작품을 보기 위해 찾아온 사람이 도시를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지역 비엔날레가 도시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방식이다.

-전시장이 도시 전체로 확장될 때

기존 전시의 경계는 비교적 분명하다.
미술관의 문을 열고 들어가 작품을 보고 문을 나서면 전시는 끝난다. 그러나 장소특정적 문화행사는 달라야 한다. 전시장을 나온 뒤에도 경험이 지속되어야 한다. 식당에서 지역의 음식을 만나고, 카페에서 사람을 만나며, 마을길을 걷고, 역사적 장소를 방문하고, 다시 작품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까지 문화경험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비엔날레의 전시장은 건물이 아니라 도시 전체가 된다.
나주미술관도 전시장이고, 송림아트센터도 전시장이고, 마을도 전시장이고, 카페도 문화공간이며, 사람들의 대화와 SNS까지 전시의 연장선이 된다.
금보성비엔날레가 기존 비엔날레와 실질적으로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나주야~’라는 노래가 등장한다

여기에 전혀 다른 장르가 들어온다.
‘나주야~’라는 노래다.
처음에는 미술비엔날레와 대중음악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문화는 장르별 행정구역처럼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의 기억 속에서는 그림과 음악, 음식과 장소, 사람과 사건이 함께 저장된다.
특히 노래는 미술과 다른 침투력을 가진다.
미술관에 가지 않는 시민도 노래를 들을 수 있다.
어린이도, 청년도, 노인도 들을 수 있다.
카페에서 들을 수 있고 버스킹에서 함께할 수 있으며, 유튜브와 SNS를 통해 지역 밖으로 이동한다.
미술이 시각을 통해 나주를 경험하게 한다면 노래는 청각을 통해 나주를 기억하게 한다.
그래서 한 문장으로 압축할 수 있다.
금보성비엔날레가 나주를 보게 한다면, ‘나주야~’는 나주를 부르게 한다.

-문화가 시민에게 ‘스며든다’는 것

문화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민이다.
아무리 세계적인 작가가 참여하고 유명한 전시가 열려도 시민이 그것을 자신의 문화라고 느끼지 못한다면 행사가 끝나는 순간 관계도 끝난다. 문화가 살아남으려면 시민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아이들이 한글 작품을 보고, 주민들이 전시장을 찾아오고, 카페에서 사람들이 작품을 이야기하고, 버스킹에서 ‘나주야~’를 듣고, 누군가는 영상을 촬영해 SNS에 올리고, 외지의 누군가는 그것을 보고 나주를 찾아오는 것. 이러한 순환이 중요하다.

전시 → 시민 → 음악 → SNS → 방문 → 관광 → 다시 시민. 문화는 바로 이 순환 속에서 도시의 기억이 된다. 단발성 축제와 문화도시의 차이도 여기에 있다. 행사는 끝나지만 기억은 남아야 한다.

-SNS는 새로운 전시장이다

오늘날 문화의 중심과 주변을 결정하는 조건도 달라졌다. 과거에는 서울이나 뉴욕 같은 대도시에 있어야 언론과 미술계의 관심을 받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SNS와 유튜브는 공간의 위계를 상당 부분 흔들어 놓았다. 나주의 작은 마을에서 만들어진 이미지도 세계로 이동할 수 있다. 27미터의 작품을 실제로 보는 경험과 스마트폰 화면으로 접하는 경험은 물론 같지 않다. 그러나 디지털 이미지는 사람에게 질문을 발생시킨다.
“저것은 무엇인가.” 그 질문이 검색으로 이어지고, 영상으로 이어지고, 실제 방문으로 연결될 수 있다. 따라서 SNS는 단순한 광고매체가 아니다. 오늘날에는 전시장의 두 번째 공간이다. 현장에서 경험한 사람이 다시 영상을 올리는 순간 관람객 자신도 전시를 확산시키는 매개자가 된다. 지역에서 세계로 가는 문화는 이제 중앙의 허가를 반드시 기다릴 필요가 없다.

-나주를 홍보하는 것과 나주를 문화로 만드는 것은 다르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구분이 필요하다. 비엔날레를 이용해 나주를 홍보하는 것과 비엔날레를 통해 나주에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도시마케팅이다. 후자는 문화생산이다.
‘나주에 좋은 전시가 있습니다’라고 알리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사람들이 “왜 이 전시는 나주에서 보아야 하는가”라고 물었을 때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나주의 역사와 한글이 만나고, 농촌의 공간과 현대회화가 만나며, 레지던시와 지역주민이 만나고, 미술과 음악이 만나고, 오프라인의 경험이 SNS를 통해 다시 세계로 이동하는 구조. 이것이 만들어진다면 나주는 단순한 개최지가 아니다. 전시의 의미를 생산하는 장소가 된다.

-세계적인 문화도시는 크기로 결정되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세계적인 문화도시를 거대한 건축물과 유명 미술관, 막대한 예산으로 상상한다. 그러나 문화의 역사를 보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장소에서만 가능한 문화적 경험이 존재하는가이다.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전시를 개최하는 도시보다 그 도시에서만 볼 수 있는 작품과 이야기를 가진 장소가 오히려 강력하다. 그런 의미에서 금보성비엔날레가 나주에 던지는 가장 중요한 가능성은 ‘세계적인 행사를 유치했다’는 표현에 있지 않다. 나주에서 세계에 내놓을 새로운 문화언어를 생산할 수 있는가에 있다. 그 언어 가운데 하나가 한글일 수 있다.

-한글은 한국의 유산인가, 미래의 미술언어인가

우리는 한글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자랑과 창조는 다르다. 한글이 위대한 문자라는 사실을 반복하는 것만으로 새로운 한글문화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21세기의 질문은 달라야 한다. 한글로 무엇을 새롭게 만들 것인가. 금보성의 작업은 그 질문에 회화로 접근한다. 읽는 한글에서 보는 한글로. 문자에서 선으로.
선에서 면으로. 면에서 색으로. 색에서 회화로. 회화에서 공간으로. 그리고 공간에서 다시 도시로. 이 과정이 성공한다면 한글은 문화유산의 보존대상에 머물지 않는다. 계속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내는 살아 있는 문화의 원천이 된다.

-비평이 필요한 이유

그러나 금보성비엔날레 역시 찬사만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새로운 형식을 주장할수록 더 엄격한 비평이 필요하다. ‘개인비엔날레’라는 명칭이 새롭다는 이유만으로 미술사적 의미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한글을 사용한다고 자동으로 독창적인 현대미술이 되는 것도 아니다. 나주에서 개최한다고 저절로 지역문화가 형성되는 것도 아니다. 결국 작품과 시간이 증명해야 한다. 한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작품이 시각적으로 성립하는가. 크랙과 레이어가 단순한 기법이 아니라 작품의 철학과 연결되는가. 재료 연구가 보존과 기록으로 이어지는가. 나주라는 장소가 홍보문구가 아니라 실제 작품 경험의 일부가 되는가.
시민이 관람객을 넘어 문화의 주체로 참여하는가. 그리고 전시가 끝난 뒤 기록과 비평, 연구와 교육이 남는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완전한 비평은 작품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 줄 수 있는 가장 깊은 찬사다. 비평을 견딜 수 있는 작품만이 미술사의 시간을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비엔날레의 가장 큰 작품은 무엇인가

결국 금보성비엔날레의 가장 큰 작품은 무엇일까.
한글회화 한 점인가. 27미터의 대형작품인가. 크랙으로 만들어진 화면인가. 아니면 나주라는 도시일까.
나는 마지막 가능성에 주목한다. 한 작가의 작업이 한글과 만나고, 한글이 회화가 되며, 회화가 공간으로 확장되고, 그 공간이 나주의 역사와 연결되며, 주민과 관람객이 만나고, ‘나주야~’라는 노래가 시민의 일상으로 들어가고, 그 경험이 SNS를 통해 다시 지역 밖으로 퍼져나간다면, 비엔날레의 가장 큰 작품은 더 이상 하나의 캔버스가 아닐 수 있다. 도시의 문화적 기억이 변화하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작품이 될 수 있다.

-시장의 가격보다 오래 남는 것

키아프와 프리즈, 아트바젤과 아트바젤 홍콩, 뱅크아트페어와 조형아트서울이 미술의 시장과 유통을 움직인다면 금보성비엔날레가 해야 할 일은 그 시장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다. 아트페어에는 아트페어의 역할이 있다. 비엔날레에는 비엔날레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아트페어는 작품의 시장을 만들 수 있다.
미술관은 작품을 보존할 수 있다. 비평은 작품을 검증할 수 있다. 그러나 비엔날레는 한 시대가 기억할 질문을 만들어야 한다. 금보성비엔날레가 남겨야 할 것도 결국 숫자가 아니다. 몇 명이 찾아왔는가보다 무엇을 보고 돌아갔는가. 몇 점을 전시했는가보다 어떤 작품을 기억하는가. 얼마나 큰 전시였는가보다 어떤 질문을 남겼는가. 그리고 한 가지 질문은 끝까지 남는다. 한글이라는 오래된 문자는 21세기 세계미술에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시각언어가 될 수 있는가.
그 질문에 작품으로 답할 수 있다면 나주는 더 이상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이라는 지리적 설명으로만 남지 않는다. 한글과 미술재료, 회화와 공간, 역사와 마을, 시민과 음악이 만나는 하나의 문화적 발신지가 될 수 있다.

한글을 읽음에서 봄으로. 문자를 회화로. 회화를 공간으로. 전시장을 마을과 도시로. 나주의 역사를 오늘의 문화로. 그리고 ‘나주야~’라는 노래를 시민의 기억에서 세계의 귀로. 세계적인 문화도시는 반드시 세계의 중심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자신만의 언어를 가진 지역이 그 언어를 세계가 경험할 수 있는 문화로 만들어내는 순간, 주변은 더 이상 주변이 아니다.

금보성비엔날레가 나주에서 증명해야 할 것은 결국 이것이다. 미술이 한 도시의 새로운 기억을 만들 수 있는가. 한글이 한 국가의 문자를 넘어 세계가 감각하는 미술언어가 될 수 있는가. 그리고 나주라는 도시가 그 새로운 언어의 발신지가 될 수 있는가.

비엔날레의 진정한 규모는 전시장의 평수도, 참여작가의 숫자도 아니다. 전시가 끝난 뒤에도 그곳에서 시작된 질문이 얼마나 오래 살아남는가. 바로 그것이 금보성비엔날레가 시장의 시간을 넘어 미술사의 시간으로 들어가기 위해 통과해야 할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최성민 더파워 기자 Sungmin@thepower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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