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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 흔들리자 ESS가 떠올랐다…AI 데이터센터가 바꾸는 K배터리 성장축

한승호 기자

기사입력 : 2026-08-27 14:41

세계 EV 배터리 수요 2025년 30% 늘었지만 국내 주요 기업 실적은 부진
유럽서 한국 점유율 2년 새 55%→35%…중국은 42%→61%
글로벌 ESS 2035년 1449GWh 전망…미국 탈중국 정책이 새 변수

출처 Magnific
출처 Magnific
[더파워 한승호 기자] 세계 전기차 배터리 시장이 여전히 성장하고 있는데도 한국 배터리 기업들의 실적은 뒷걸음질치고 있다. 흔히 거론되는 ‘전기차 캐즘’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흐름이다.

한국 배터리산업이 의존해 온 미국 시장과 고성능 삼원계(NCM) 배터리가 동시에 흔들리면서 위기의 성격 자체가 구조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27일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2025년 세계 전기차(EV) 배터리 수요는 약 1.2TWh로 전년보다 30% 증가했다. 글로벌 전기차 판매량이 처음 2000만대를 넘어선 영향이다. 배터리산업 전체의 수요가 멈춘 상황은 아니라는 의미다.

반면 국내 기업의 성적표는 달랐다.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 포스코퓨처엠의 2025년 매출은 각각 전년 대비 7.6%, 20.0%, 20.6% 감소했다.

올해 1분기에도 LG에너지솔루션은 2078억원, 삼성SDI는 1556억원, 포스코퓨처엠 배터리소재 부문은 11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산업연구원이 짚은 첫 번째 문제는 ‘시장’이다. 국내 배터리업계가 최근 2~3년 동안 투자 역량을 집중했던 미국에서 전기차 수요가 급격하게 위축됐다.

미국 배터리전기차(BEV) 판매 증가율은 2025년 4분기 -31%, 2026년 1분기 -23%를 기록했다. 지난해 9월 전기차 구매세액공제가 폐지된 영향이 미국 시장의 수요 감소로 이어졌고, 미국에 대규모 생산거점을 구축해온 국내 배터리 기업이 충격을 크게 받았다.

두 번째 문제는 한국의 주력 제품이다. 한국 기업이 강점을 가져온 NCM 배터리가 최근 전기차 시장의 가격 경쟁과 맞물리면서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그 변화는 유럽에서 선명하게 나타났다. 유럽 전기차 시장은 2024년 6% 역성장했지만 2025년에는 30% 성장으로 반등했다. 영국과 프랑스 등 주요국의 보조금 재도입과 중저가 전기차 수요 확대가 시장 회복을 이끌었다.

하지만 늘어난 수요가 한국 기업으로 향하지 않았다. 유럽 배터리 시장에서 한국 기업의 합산 점유율은 2023년 55%에서 2025년 35%로 20%포인트 떨어졌다. 같은 기간 중국 업체 점유율은 42%에서 61%로 19%포인트 상승했다.

전기차 수요가 회복됐지만 가격 경쟁력이 높은 LFP 배터리 비중이 커지면서 중국 기업이 시장 확대의 상당 부분을 가져간 것이다. 고성능·고가격의 NCM을 앞세운 한국 기업이 전기차 시장의 ‘중저가화’에 직면한 셈이다.

산업연구원은 이에 따라 최근 K배터리의 부진을 전기차 캐즘이라는 일시적 수요 둔화로만 보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주력 시장인 미국과 주력 제품인 NCM의 동반 부진이 구조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배터리산업 자체의 성장 동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성장축이 전기차에서 다른 영역으로 넓어지고 있다. 산업연구원이 주목한 시장이 에너지저장장치(ESS)다.

ESS 수요 확대의 한 축은 재생에너지다. 태양광과 풍력은 발전량이 날씨에 따라 달라지는 만큼 전력 생산과 소비를 안정적으로 맞추려면 잉여 전력을 저장했다 필요할 때 공급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재생에너지 비중이 올라갈수록 전력망용 ESS의 역할도 커지는 구조다.

여기에 AI 데이터센터가 새로운 수요처로 붙고 있다. 미국 데이터센터의 전력소비 비중은 2023년 전체 전력소비의 4.4%에서 2028년 6.7~12.0%까지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AI 데이터센터는 정전뿐 아니라 순간적인 전압 강하나 주파수 변화에도 민감하다. 배터리를 활용한 무정전전원장치(UPS)가 서비스 연속성과 전력 품질을 유지하는 장치로 사용되고, 데이터센터가 밀집한 지역에서는 대규모 ESS가 송전 제약과 피크 수요를 완화하는 역할까지 맡는다.

시장 규모도 빠르게 커질 전망이다. 글로벌 ESS 시장은 2023년 185GWh에서 2035년 1449GWh로 확대될 것으로 추정됐다. 연평균 성장률은 19%다.

규모에서는 전력망용 ESS가 시장을 이끌지만 성장 속도는 AI 데이터센터용 UPS가 더 빠르다. 2023~2035년 연평균 성장률은 전력망용 ESS가 약 14%, UPS는 40%로 전망됐다.

한국 업체에 더 중요한 곳은 미국이다. 미국 ESS 시장은 2023년 55GWh에서 2035년 320GWh로 연평균 16% 성장할 것으로 예상됐다.

특히 AI 데이터센터용 UPS는 연평균 47% 성장해 2035년 135GWh까지 확대될 것으로 추정됐다. 같은 해 전력망용 ESS 전망치 156GWh에 근접하는 규모다. AI가 ESS 시장의 별도 대형 수요처를 만드는 구조인 셈이다.

다만 ESS가 커진다고 K배터리가 자동으로 수혜를 받는 것은 아니다. 현재 ESS의 주력 제품인 LFP는 원료와 소재 공급망, 생산 규모, 제조원가 모두 중국 기업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

여기서 미국 정책이 변수가 된다. 미국은 ESS 시장을 키우는 동시에 관세와 첨단제조 생산세액공제(AMPC), 중국 공급망 규제를 결합해 중국산 제품 의존도를 낮추고 있다.

현재 중국산 ESS에는 기본 관세와 무역법 301조 관세 등이 더해져 40.9%의 관세가 적용되고 있다. 한국산 ESS의 합산 관세율은 12.5%로 양국 제품 사이에는 28.4%포인트의 격차가 발생한다.

중국이 LFP 제조원가에서 상당한 우위를 유지하고 있어 관세만으로 가격 차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미국 현지 생산 시 받을 수 있는 AMPC까지 더하면 경쟁 구도는 달라질 수 있다.

미국에서 배터리 셀과 모듈을 생산·판매하면 셀은 kWh당 35달러, 모듈은 10달러의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다. 셀과 모듈을 모두 현지 생산하면 최대 kWh당 45달러다.

동시에 지원을 받기 위한 문턱은 높아졌다. 미국은 금지외국기관(PFE)과 연결된 원료·부품·기술을 사용한 제품을 AMPC 대상에서 제외하는 공급망 규제를 도입했다.

배터리 부품에서 PFE가 아닌 공급원으로 조달해야 하는 직접 재료비 비율은 2026년 60%에서 2027년 65%, 2028년 70%, 2029년 80%, 2030년 이후 85%로 높아진다.

중국이 배터리 핵심광물과 소재 공급망에서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한국 기업에도 단기 부담은 불가피하다. LFP 양극재와 흑연, 전구체 등에서 중국 의존도를 낮춰야 미국의 세액공제 효과를 제대로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지배구조와 기술 라이선스, 소재 조달을 포함한 PFE 요건을 중국 기업이 충족하기는 한국 기업보다 더 어렵다는 게 산업연구원의 분석이다. 미국 현지 생산 기반을 이미 확보한 국내 업체가 탈중국 소재 공급망까지 구축할 경우 미국 ESS 시장에서 상대적인 경쟁 여건이 개선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연방 조달 시장에서도 같은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미국 하원을 통과한 H.R.1166은 국토안보부가 CATL과 BYD 등 특정 중국 기업이 생산한 배터리를 조달하는 것을 제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다만 이 법안은 아직 상원을 통과하지 않았다. 적용 범위도 미국 민간 ESS 시장 전체가 아니라 국토안보부 조달에 한정된다. 산업연구원 역시 H.R.1166만으로 중국산 ESS가 미국에서 퇴출될 것으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선을 그었다.

그럼에도 전력망과 데이터센터용 배터리가 주요 인프라와 연결되면서 미국 공공조달의 평가 기준이 가격·성능을 넘어 공급업체의 국적과 지배구조, 데이터 보안까지 넓어지는 흐름에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분석했다.

국내 정책의 초점도 전기차 배터리에만 머물러서는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우선 미국 PFE 규제에 대응하려면 배터리 소재까지 포함한 탈중국 공급망이 필요하다.

산업연구원은 정부가 추진하는 이차전지 국내생산세액공제를 주요 수단으로 꼽았다. 현재 국내 배터리산업은 소재를 국내에서 생산한 뒤 해외 배터리 공장으로 보내는 구조가 자리 잡고 있어 소재기업의 생산비용을 낮추면 미국 현지 배터리 생산의 공급망 경쟁력에도 연결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다만 적자 기업은 법인세를 전제로 한 세액공제의 실질적 혜택을 받기 어렵다. 이에 직접 환급이나 제3자 양도를 허용하는 방식의 제도 설계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기술 전략도 달라져야 한다. 전기차에서는 에너지밀도가 높은 NCM 셀 경쟁력이 핵심이었다면 ESS에서는 가격과 시스템 통합 역량의 중요성이 더 크다.

LFP와 차세대 ESS 배터리뿐 아니라 전력변환장치(PCS), 배터리관리시스템(BMS), 에너지관리시스템(EMS)까지 경쟁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게 산업연구원의 제안이다. 수요기업이 참여하는 실증과 표준화 지원을 통해 셀 제조에서 시스템 전체로 기술 기반을 확대할 필요성도 제기했다.

결국 K배터리가 맞닥뜨린 문제는 배터리를 찾는 수요가 사라졌다는 데 있지 않다. 세계 EV 배터리 수요는 여전히 늘고 있고, ESS라는 새로운 시장은 더 빠르게 커지고 있다. 문제는 시장이 원하는 제품과 한국 기업이 강점을 가진 제품 사이에 간극이 생겼다는 점이다.

전기차와 NCM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기존 성장 공식이 흔들리는 사이 재생에너지와 AI 데이터센터가 ESS라는 또 다른 시장을 키우고 있다. 산업연구원의 진단대로라면 K배터리의 다음 승부는 전기차 시장의 반등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미국 현지 생산과 탈중국 소재 공급망, LFP·ESS 시스템 기술을 얼마나 빠르게 새로운 경쟁력으로 연결하느냐에 달려 있다.

한승호 더파워 기자 hansh1975@thepower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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