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건축의 초창기 여성 건축가로 꼽히는 조계순 건축가가 자신의 반세기 건축 여정을 담은 책 『조계순 건축 50년, 삶을 짓다』(기문당)를 출간했다. 이 책은 전통과 현대를 잇는 한국적 건축 정신을 기록한 귀중한 사료로, 건축을 통해 한 시대의 문화와 사회, 그리고 여성의 역할을 새롭게 비춰본다.
조계순은 한국 현대건축 1세대인 정인국, 엄덕문, 최순우, 김수근 등의 제자로, 남성 중심의 건축계에서 여성으로서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온 선구자다. 한국이 급격히 근대화되던 시기에 활동하며, 전통 건축의 미학과 서구적 구조 개념을 조화롭게 결합해왔다. 그의 건축은 단순한 공간 설계가 아닌, ‘장소의 감각’과 ‘자연과의 조화’라는 철학적 주제를 중심에 둔다.
그의 대표작들은 이러한 사유를 잘 보여준다. ‘단연재’는 한옥의 처마와 툇마루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으며, ‘한운재’는 서까래의 곡선을 모티프로 한국적 미감을 살렸다. 특히 자택인 ‘백운재’는 50년간의 증·개축을 통해 전통의 ‘칸’ 개념과 서양식 철골 구조를 결합한 실험적 건축의 결정체로 평가받는다. 단정한 외관 속에 따뜻한 전통의 정서를 담은 백운재는, 현대인의 삶 속에서 ‘공간이 인간의 관계를 매개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또한 그는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는 건축가로도 주목받았다. ‘봉천동 소슬유치원 리노베이션 프로젝트’에서는 아동의 심리와 행동과학을 반영하여 놀이를 통한 학습이 이루어지는 환경을 설계했다. 이는 당시 유아 교육시설의 새로운 모델로 평가받으며, 건축이 사회적 변화를 촉진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로 남았다.
조계순 건축가는 “건축은 단지 공간을 짓는 행위가 아니라, 사람과 자연, 문화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예술”이라고 강조한다. 그의 건축은 미학과 실용, 개인적 성찰과 사회적 가치가 공존하는, 진정한 ‘삶의 건축’을 구현한다.
이번 도서는 건축가로서의 고뇌와 성취, 그리고 여성으로서의 도전이 교차하는 기록이다. 『조계순 건축 50년, 삶을 짓다』는 단순한 작품집이 아니라, 건축을 통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묻는 철학적 자서전이기도 하다.
비록 출판기념회는 성황리에 마쳤지만, 이 책은 여전히 건축계와 문화예술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전통과 현대를 잇는 건축, 그리고 시대의 한계를 넘어선 한 여성 건축가의 삶이 담긴 이 책은, 다음 세대 건축가들에게 귀중한 영감의 원천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