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파워 이설아 기자] 22대 국회 출범 이후 기업 규모에 따라 규제를 달리 적용하는 이른바 ‘차등규제’ 법안이 잇따라 발의되면서, 기업이 커질수록 부담이 늘어나는 제도 환경이 더 고착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대한상공회의소는 8일 기업 활동과 연관성이 큰 12개 법률을 대상으로 2024년 5월 30일부터 2025년 12월 31일까지 발의된 법안 1021건을 전수 조사한 결과, 기업 규모에 따라 규제를 차등 적용하는 내용이 담긴 법안이 149건에 달한다고 밝혔다.
대한상의 분석에 따르면, 이미 해당 12개 법률 안에 기업 규모별 차등규제가 343건 존재하는 상황에서 불과 19개월 만에 추가 차등규제가 149건 더 발의된 셈이다. 대한상의는 “한국의 기업 규모별 차등규제는 성장한 기업일수록 의무와 부담이 늘어나는 독특한 ‘성장 패널티’”라며 “규모 기준을 당연한 전제처럼 확대해 온 입법 관행이 성장 회피 성향을 제도적으로 굳히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번에 발의된 149건은 성격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일정 자산이나 종업원 수 이상 기업에만 추가 의무를 부과하는 ‘규제 증가형’이 94건, 기업 규모가 커질수록 세제 등 각종 혜택을 줄이는 ‘혜택 축소형’이 55건이다. 두 유형 모두 “기업이 커질수록 불리해지는 구조”라는 점에서 성장 인센티브를 약화시키는 공통된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 대한상의의 진단이다.
규제 증가형 법안 94건 가운데 상법 개정안이 65건으로 가장 많았다. 자산 2조원 이상 기업에 전자주주총회 의무화, 감사위원 분리선임 의무 확대 등 지배구조·의사결정 관련 의무를 추가하는 내용이 대표적이다. 유통산업발전법 관련 법안이 12건, 산업안전보건법 7건, 공정거래법 6건 등으로 뒤를 이었고, 금융지주회사법, 대·중소기업 상생협력법, 자본시장법 등에서도 자산·매출·고용 규모를 기준으로 규제를 가르는 조항이 새로 제시됐다.
대한상의는 “자산 2조원 이상이라는 상법상 기준은 2000년 도입 이후 경제 규모와 물가, 시장 구조가 크게 달라졌음에도 별도의 검증 없이 관행적으로 차용되고 있다”며 “기업이 일정 규모를 넘는 순간 자동으로 ‘규제 상향 단계’에 진입하는 구조가 굳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유통산업발전법상의 대형마트 의무휴업처럼 특정 규모 이상 오프라인 유통업체에만 영업제한을 두는 방식도 여전히 유지·확대되는 흐름으로 나타났다. 대한상의는 “소비 중심축이 온라인·모바일로 이동한 현실을 고려하면, 오프라인 대형 점포에만 규제를 집중하는 방식은 실효성과 형평성 측면에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했다.
반대로 기업 규모가 커질수록 세제 혜택이 줄어드는 ‘혜택 축소형’ 차등규제는 55건으로 모두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에 몰려 있었다. 연구개발(R&D), 설비투자, 특정 기술 개발 등에 대해 세액공제를 제공하되, 대기업·중견기업·중소기업별로 공제율을 차등 적용하거나, 아예 중소·중견기업에만 인센티브를 주는 구조가 반복된 것이다.
대한상의는 “첨단 기술 분야에서 해외 기업과 직접 경쟁해야 하는 주체는 대부분 대규모 투자 여력이 있는 대기업인데, 오히려 세제지원은 제한적으로 설계돼 있다”며 “국내 기업 간 형평성만을 기준으로 설계된 제도가 글로벌 경쟁 환경과는 괴리를 보이고 있다”고 평가했다.
또한 혜택 축소형 법안의 상당수는 기존 조항의 공제율 구조를 ‘복붙’하듯 따라가는 양상을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상의는 “규모별 공제율이 여러 조항에서 거의 같은 패턴으로 반복되는 것은 효과 분석이나 실증 근거 없이 기존 틀을 기계적으로 답습해 온 결과”라며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등 주요국 사례를 봐도 기업 규모에 따라 세제 혜택을 줄이는 사례는 찾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대한상의는 이번 조사 결과를 계기로 기업 규모를 기준으로 의무와 혜택을 기계적으로 나누는 규제 설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석구 대한상의 조사본부장은 “글로벌 기술 경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기업 규모만으로 규제와 혜택을 구분하는 방식은 더 이상 유효한 정책 수단이 아니다”라며 “그동안 쌓여 온 규모별 차등규제를 전면적으로 재점검하고, 성장과 혁신을 유인하는 방향으로 규제 패러다임을 재설계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