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는 읽는 기호이면서 동시에 보는 형상이었고, 서예는 의미를 기록하는 기술이면서 정신과 신체의 움직임을 드러내는 예술이었다. 중국 미학이 오랫동안 서화동원(書畫同源)을 말해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글씨와 그림은 서로 다른 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뿌리에서 출발한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중국 비평가의 눈으로 금보성의 한글회화를 바라볼 때 가장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은 분명해진다.
한글회화는 동아시아가 이미 오래전부터 구축해온 문자예술과 무엇이 다른가.
한글을 화면에 등장시킨 것만으로는 새로운 미술사적 좌표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문자를 추상화하거나 획을 조형적 요소로 사용하는 것 역시 동아시아 미술에서 낯선 방법이 아니다.
따라서 금보성의 작업이 미술사적으로 성립하려면 한글이라는 문화적 특수성을 넘어서는 독자적인 조형 원리를 증명해야 한다.
그 증명은 설명이 아니라 작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한자와 한글은 서로 다른 조형적 출발점을 갖는다
한자는 오랜 시간 형상과 의미를 축적하며 발전한 문자다.
하나의 글자 안에 의미와 역사, 필획과 공간이 중첩되어 있다. 따라서 중국의 서예가가 한 글자를 쓰는 행위에는 이미 수천 년 동안 축적된 문자미학이 개입한다.
그러나 한글의 출발점은 다르다.
한글은 비교적 명확한 생성 원리와 결합 체계를 가진다. 자음과 모음이라는 기본 단위가 결합하면서 하나의 글자를 형성한다.
이 차이는 중요하다.
한자의 미학이 한 글자 안에 축적된 형상과 필획을 연구해왔다면, 한글회화가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오히려 결합 이전의 단위와 그 관계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금보성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든다.
완성된 글자를 아름답게 쓰는 것이 아니라 글자를 해체하고, 획을 분리하며, 문자를 구성하던 요소를 선·면·색·간격·중첩의 관계로 이동시킨다.
따라서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한글의 모양이 아니다.
한글이 만들어지는 방식 자체를 회화의 발생 원리로 전환할 수 있는가.
여기서부터 그의 작업은 서예와 다른 길을 선택한다.
-서화동원 이후의 질문
중국 미학에서 서예와 회화의 관계는 오래된 문제다.
붓의 운동, 먹의 농담, 획의 속도와 호흡을 통해 글씨는 이미지가 되고 이미지는 다시 정신의 흔적이 된다.
그러나 금보성의 한글회화에서 획은 반드시 신체의 흔적으로 남지 않는다.
분리되고, 절단되고, 반복되고, 확대된다.
때로는 색면이 되고, 때로는 화면을 가르는 경계가 되며, 더 큰 규모에서는 건축적 공간을 조직하는 단위가 된다.
이 차이는 작지 않다.
중국 서예가 획을 어떻게 쓰는가를 중심으로 발전했다면 금보성의 작업은 다른 질문을 던진다.
획은 어디까지 다른 것이 될 수 있는가.
문자의 획이 선이 되고,
선이 면을 만들고,
면이 색과 충돌하며,
회화가 다시 공간으로 이동한다면,
한글은 더 이상 기록을 위한 문자에 머물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비평은 더욱 엄격해져야 한다.
가능성과 성립은 다르기 때문이다.
-한글을 제거한 뒤에도 작품은 남는가
금보성의 작업을 평가하는 가장 가혹하면서도 필요한 방법은 한글이라는 이름을 잠시 제거하는 것이다.
작품 앞에서 ‘한글’이라는 설명을 지워보자.
세종대왕도,
훈민정음도,
한국문화도,
민족적 상징도 잠시 내려놓아야 한다.
그 이후 무엇이 남는가.
색과 색 사이의 긴장,
선과 면의 충돌,
분할과 반복의 리듬,
비어 있는 공간과 채워진 공간의 관계가 독립적인 회화적 질서를 형성하는가.
그렇다면 한글은 작품을 설명하기 위한 소재가 아니라 작품을 발생시킨 내부 구조였다고 말할 수 있다.
반대로 ‘한글’이라는 설명을 제거하는 순간 작품의 긴장이 사라진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 경우 한글은 구조가 아니라 문화적 표지가 된다.
좋은 문자예술과 새로운 회화언어 사이의 경계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읽지 못하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
중국 관람자는 대부분 한글을 읽지 못한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중국 관람자는 금보성의 작업을 검증하기에 매우 흥미로운 관람자가 된다.
한국 관람자는 화면에서 한글의 흔적을 발견하는 순간 의미를 찾으려 한다. 무엇이라고 쓰였는지, 어떤 자음인지, 어떤 뜻을 암시하는지 질문한다.
그러나 한글을 읽지 못하는 관람자에게 이러한 언어적 통로는 처음부터 차단되어 있다.
따라서 중국에서 금보성의 작품이 성립한다면 그것은 한글을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한글을 이해하지 않아도 작품을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어야 한다.
이것은 중요한 시험이다.
한글을 모르는 사람 앞에서도 회화가 남는다면 한글은 비로소 한국문화의 표지를 넘어 하나의 조형언어가 될 가능성을 갖는다.
사진제공=송림아트센터
-크기는 곧 공간이 아니다
대형 작업 역시 같은 기준으로 보아야 한다.
작품이 커졌다고 회화가 공간으로 확장되는 것은 아니다.
작은 그림을 확대했을 뿐이라면 그것은 규모의 변화이지 미학적 전환은 아니다.
진정한 공간적 확장은 관람 방식 자체가 달라질 때 발생한다.
관람자가 한눈에 작품 전체를 소유할 수 없고,
몸을 움직여야 하며, 가까이에서 부분을 경험하고,
멀어지면서 다시 전체를 인식해야 한다면 회화는 비로소 시선의 대상에서 신체의 경험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금보성의 대형 한글회화에서 중요한 것은 몇 미터인가가 아니다.
관람자의 몸이 작품의 일부가 되는가.
그것이 공간으로의 확장을 판단하는 기준이어야 한다.
-중국 문자미학과 다른 좌표는 가능한가
중국 현대미술 역시 문자에 대한 수많은 실험을 경험했다.
전통 서예의 해체, 문자의 반복, 읽을 수 없는 글자의 창조, 언어와 권력의 관계, 문자와 이미지의 충돌은 이미 중요한 현대미술의 영역이 되었다.
따라서 금보성의 한글회화가 국제미술사에서 의미를 얻기 위해서는 단순히 “한국에도 문자예술이 있다”는 수준을 넘어야 한다.
오히려 질문은 반대가 되어야 한다.
한글이라는 독특한 문자 구조가 기존 문자미술에서는 발생하지 않았던 어떤 회화적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가.
바로 여기에 금보성 작업의 가능성과 위험이 동시에 존재한다.
한글의 문화적 특수성에 의존하면 쉽게 설명될 수 있지만 쉽게 소진된다.
그러나 한글의 생성 원리를 회화의 생성 원리로 전환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순간 한글은 한국을 설명하는 기호가 아니라 현대미술을 생산하는 하나의 방법론이 될 수 있다.
-아직 좌표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금보성의 미술사적 좌표를 지금 확정하는 것은 이르다.
미술사의 좌표는 작가가 선언한다고 만들어지지 않는다.
전시 규모도,
작업 기간도,
관람객의 숫자도,
비평가의 찬사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다.
좌표는 작품이 반복되는 검증을 통과하면서 형성된다.
한글이 없어도 회화가 남는가.
그러면서도 한글이 아니었다면 만들어질 수 없었던 구조가 존재하는가.
이 두 조건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금보성의 한글회화가 넘어야 할 가장 중요한 문턱이다.
한글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한글이 아니면 발생할 수 없는 회화.
그 역설을 해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하나의 독자적인 미학이 시작될 수 있다.
-비평이 가장 깊은 찬사가 되는 순간
중국에는 오래된 예술 전통이 있다.
전통이 오래되었다는 것은 새로운 예술에 더 관대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이미 수많은 형식과 실험을 경험했기 때문에 새로움을 주장하는 작품에는 더욱 엄격한 질문이 요구된다.
금보성의 한글회화 역시 그러한 질문을 피해서는 안 된다.
그의 작품을 존중하는 방법은 쉽게 ‘독창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더 어려운 시험대에 올려놓는 것이다.
문자는 회화가 되는가.
회화는 공간이 되는가.
공간은 문화적 설명 없이도 경험되는가.
그리고 그 모든 변환을 가능하게 만든 근원에 정말 한글의 구조가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작품이 스스로 답할 수 있다면 금보성의 한글회화는 한국의 문자예술이라는 지역적 범주를 넘어설 수 있다.
중국의 서예와 문자미학이 수천 년 동안 “문자를 어떻게 아름답게 쓸 것인가”에서 “문자를 통해 어떻게 정신을 드러낼 것인가”로 질문을 확장해왔다면, 금보성이 제시해야 할 다음 질문은 어쩌면 이것일 것이다.
문자는 어디까지 문자가 아니어도 존재할 수 있는가.
그 질문이 회화가 되고, 회화가 공간이 되고, 공간이 하나의 새로운 인식 방식으로 남을 때,
비로소 한글은 읽히는 문자의 역사에서 벗어나 경험되는 미술의 역사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아직 그 좌표는 완성되지 않았다.
그러나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은 결핍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미술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작품은 이미 좌표를 가진 작품이 아니라 기존의 좌표로는 정확히 측정할 수 없어 새로운 좌표를 요구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금보성의 한글회화에 필요한 비평도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찬사가 아니라 검증으로.
확정이 아니라 질문으로.
그리고 그 질문을 끝까지 견디는 작품이라면,
비평은 마침내 가장 깊은 찬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