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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특집 비평 : 금보성비엔날레] 한글이 침묵할 때 회화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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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특집 비평 : 금보성비엔날레] 한글이 침묵할 때 회화가 시작된다

최성민 기자

기사입력 : 2026-08-25 11:05

사진제공=송림아트센터
사진제공=송림아트센터
-독일 미학의 시선으로 본 금보성의 한글회화

금보성의 작품 앞에서 가장 먼저 버려야 할 질문은 “무슨 글자인가”이다.

그의 작품을 문자로 읽으려는 순간 우리는 작품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친다. 금보성의 화면에서 한글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다루는 것은 한글의 뜻이 아니라 문자가 의미를 잃은 이후에도 무엇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의 한글회화는 한국적 소재를 사용한 회화라는 익숙한 범주에서 벗어난다.
그것은 문자에 관한 그림이 아니라 문자의 조건을 실험하는 회화에 가깝다.

-문자는 언제 물질이 되는가

서구 현대미술에서 문자는 오랫동안 이미지와 긴장 관계를 만들어왔다. 문자는 읽히기를 요구하고 회화는 보이기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문자가 회화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두 개의 서로 다른 체계가 충돌한다.

금보성은 이 충돌을 해결하지 않는다.
오히려 충돌 자체를 작품의 조건으로 사용한다.
ㄱ은 더 이상 하나의 음가를 전달하는 기호에 머물지 않는다. 방향을 가진 선이 된다.
ㅁ은 글자가 아니라 네 개의 경계가 만든 공간이 된다.
ㅇ은 소리를 전달하기 이전에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는 하나의 구조가 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다.
기호가 형태가 되고, 형태가 관계가 되며, 관계가 회화를 발생시킨다. 금보성의 한글회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변환을 보아야 한다.

-‘해제’는 금보성 작업의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금보성이 말하는 ‘봉인된 자음을 해제한다’는 표현은 흥미롭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자음을 분해한다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충분하지 않다.

해제되는 것은 글자의 모양이 아니다.
문자는 반드시 읽혀야 한다는 사회적 약속이다.
우리는 ㄱ을 보는 순간 그것을 ㄱ이라고 읽는다.
ㅇ을 보면 ㅇ이라고 인식한다.

이 과정은 너무 빠르기 때문에 우리는 글자를 실제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대부분 읽고 있다.

금보성은 이 자동적인 인식 과정에 장애물을 설치한다.
글자를 분리하고, 확대하고, 회전시키고, 일부를 제거하고, 색면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러면 독해가 중단된다.
그리고 독해가 멈추는 순간 시각이 시작된다.
이것이 그의 작업에서 ‘해제’가 갖는 미학적 의미다.
한글을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한글을 읽어야 한다는 우리의 습관을 해체하는 것이다.

-읽을 수 없다는 것은 실패가 아니다

금보성의 작품 앞에서 한국 관객이 느끼는 당혹감은 오히려 중요하다.
분명 한글처럼 보이는데 읽히지 않는다.
외국인에게는 처음부터 이미지일 수 있지만 한국인에게 한글은 너무 강력한 의미체계다.
따라서 한국 관객에게 그의 작품은 더 복잡하게 작동한다.
읽으려 한다.
읽히지 않는다.
다시 본다.
무언가를 발견한다.
다시 문자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또다시 의미가 사라진다.

이 반복 속에서 작품이 발생한다.
따라서 금보성의 한글회화에서 중요한 것은 읽음도 아니고 봄도 아니다.
읽음과 봄 사이에서 발생하는 불확정성이다.
그 불확정성이 관객을 작품 안에 오래 머물게 한다.

-균열은 결함이 아니라 사건이다

금보성의 화면에서 발견되는 크랙과 균열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완성된 표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회화에서 균열은 일반적으로 결함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는 반대다.
표면이 갈라지면서 새로운 선이 만들어진다.
작가가 계획한 획과 재료가 스스로 만들어낸 획이 한 화면에 공존한다.
이것은 중요한 변화다.

문자는 인간이 통제하는 가장 정교한 기호체계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균열은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
시간과 온도, 재료와 건조 과정이 개입한다.
따라서 그의 화면에서는 인간이 만든 문자와 물질이 만든 문자가 충돌한다.
나는 이 지점이 금보성 회화에서 앞으로 더욱 중요하게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균열이 단순한 효과에 머문다면 그것은 하나의 스타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균열이 문자 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발전한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그때 크랙은 장식이 아니라 철학이 된다.

-27미터의 한글은 더 이상 문자가 아니다

금보성비엔날레의 대형 작품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가 발생한다.
그것은 크기다.
문자는 원래 인간에게 종속되어 있다.
우리는 글자를 쓰고, 읽고, 지우고, 이동시킨다.
그러나 문자가 인간보다 압도적으로 커지면 이 관계는 뒤집힌다.
27미터에 이르는 작품 앞에서 관객은 글자를 소유할 수 없다.
한눈에 읽을 수도 없다.
생각의 몸을 움직여야 한다.
가까이에서는 표면을 보고, 뒤로 물러서야 구조가 나타난다.
관객의 몸이 작품을 측정하는 단위가 된다.
이 순간 한글은 언어에서 건축으로 이동한다.
중요한 것은 작품이 거대하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크기의 변화가 문자와 인간 사이의 권력관계를 바꾼다는 점이다.
작은 글자는 인간이 읽는다.
거대한 글자는 인간을 둘러싼다.
그리고 어느 순간 관객은 한글을 보는 사람이 아니라 한글의 내부에 들어온 사람이 된다.

사진제공=송림아트센터
사진제공=송림아트센터

-그러나 금보성의 작업에는 위험도 존재한다

중요한 작업일수록 비평은 더 엄격해야 한다.
금보성의 가장 큰 가능성은 동시에 가장 큰 위험이기도 하다.
그 위험은 ‘한글’이라는 강력한 정체성이다.
작품이 지나치게 한글이라는 사실에 의존한다면 국제무대에서 그것은 쉽게 ‘한국적인 미술’이라는 문화적 표지로 소비될 수 있다.
한글이라는 소재의 희소성이 작품의 미학적 성취를 대신해서는 안 된다.

“세계에서 유일한 한글회화”라는 설명보다 중요한 것은 다른 질문이다.

한글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관객에게도 이 작품은 강력한 회화인가.
이 질문을 통과해야 한다.
그렇다면 금보성에게 앞으로 필요한 것은 한글을 더 많이 보여주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한글을 더 깊이 숨기는 일일 수 있다.
문자의 외형은 점점 사라지는데 그 구조만 작품 속에 남는 단계.
그 단계까지 도달한다면 한글은 소재에서 완전히 벗어나 하나의 조형원리가 된다.

-세계미술사에서 중요한 것은 국적이 아니라 차이다

세계미술사는 새로운 국가를 수집하는 목록이 아니다.
한국 작가가 국제미술관에 전시된다고 자동으로 한국미술이 세계미술사의 새로운 장을 만드는 것도 아니다.
미술사가 기억하는 것은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게 만드는 차이다.
따라서 금보성의 한글회화 역시 “한국에 이런 미술이 있다”는 단계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
더 어려운 질문으로 이동해야 한다.
문자는 이미지가 될 수 있는가.
의미를 잃은 기호는 무엇이 되는가.
읽을 수 없는 문자는 여전히 언어인가.
문자의 내부에는 건축적 공간이 존재하는가.
그리고 인간은 문자를 읽는 존재인가, 문자에 의해 사고하는 존재인가.
이러한 질문으로 확장될 때 한글은 한국이라는 지리적 경계를 넘어선다.

-금보성의 진정한 실험은 한글을 그리는 데 있지 않다

금보성의 작업을 ‘한글을 이용한 추상회화’라고 정의하는 것은 너무 쉽다.
나는 오히려 그 반대로 보고 싶다.
그의 작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한글이 보이는 순간이 아니라 한글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글자는 선이 되고, 선은 경계가 되고, 경계는 면을 만들고, 면은 공간을 만들며, 공간은 관객의 신체를 끌어들인다.
이 연쇄가 충분히 발전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한글이라는 글자를 보고 있다고 말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모든 것의 출발점에는 여전히 한글이 존재한다.
바로 이 역설이 금보성 회화의 잠재력이다.

-한글회화가 장르가 되기 위한 조건

나는 아직 ‘한글회화’를 완성된 장르라고 부르는 데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장르는 한 사람이 선언해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다른 작가가 참여하고, 다른 세대가 반박하고, 전혀 다른 방법론이 나타나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실패가 축적되어야 한다.
어떤 작품은 한글회화이고 어떤 작품은 단순한 문자 디자인인지 구별할 수 있는 비평적 기준이 만들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금보성에게 중요한 역할이 있다면 자신의 형식을 후대에 반복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른 작가들이 자신과 전혀 다른 한글회화를 만들 수 있도록 문 하나를 열어놓는 것이다.
그때 개인의 스타일은 운동이 되고, 운동은 담론이 되며, 담론이 충분히 축적된 이후에야 미술사는 새로운 이름을 필요로 한다.
그 이름이 언젠가 ‘한글회화’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결론: 한글 이후의 한글

금보성비엔날레에서 내가 발견하는 가장 중요한 가능성은 한글의 아름다움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한글이 한글의 익숙한 모습을 버렸을 때 무엇이 남는가.
금보성은 그 질문 앞에 서 있다.
문자를 해체하고, 읽기를 중단시키고, 획을 색과 면으로 이동시키고, 균열을 새로운 선으로 받아들이며, 마침내 문자를 인간의 신체보다 거대한 공간으로 확장한다.
그 과정이 충분히 밀고 나아간다면 한글은 더 이상 작품의 주제가 아니다. 작품을 생성하는 보이지 않는 질서가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한글회화에 대한 평가도 달라져야 한다.

“얼마나 한글다운가”가 아니라
“한글을 출발점으로 회화에 무엇을 새롭게 추가했는가.”

이것이 더 중요한 질문이다.

금보성의 한글회화가 세계미술사에 남을 수 있는가의 문제 역시 결국 여기에 달려 있다. 한글을 세계에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세계가 아직 갖지 못했던 하나의 시각적 질문을 한글로부터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이 가능해지는 순간 금보성의 한글은 더 이상 한국어만의 문자가 아니다.
하나의 문자가 자신의 의미를 벗어나 어떻게 회화가 되고, 공간이 되고, 마침내 사유가 될 수 있는지를 묻는 시각철학이 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한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한글 이후의 한글을 보게 된다.

최성민 더파워 기자 Sungmin@thepower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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