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간 GDP 9% 규모 공공구매력 활용…혁신기술 ‘첫 구매자’ 역할
개발·구매 연계형·성과목표형·조달샌드박스 등 3대 트랙 신설
AI로봇은 R&D부터 구매 연계…우주발사체는 규격 대신 성과목표로 계약
/연합뉴스
[더파워 이경호 기자] 정부가 국가 연구개발(R&D) 과정에서 이미 경쟁을 거친 기업이 국가전략기술 개발에 성공하면 별도의 경쟁입찰 없이 성과물을 구매할 수 있도록 국가계약 제도를 개편한다.
우주발사체처럼 사전에 세부 규격을 정하기 어려운 첨단기술은 제품 규격 대신 달성해야 할 ‘성과목표’를 제시해 계약할 수 있게 된다.
정부는 28일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주재로 열린 비상경제본부 회의 겸 경제관계장관회의 겸 민생물가 특별관리 관계장관 태스크포스(TF)에서 이 같은 내용의 ‘혁신기술 촉진을 위한 국가계약 체계 개편방안’을 발표했다.
정부는 연간 238조원에 달하는 공공구매력을 활용해 정부와 공공부문이 혁신기술의 선도 수요자, 이른바 ‘첫 구매자(First buyer)’ 역할을 맡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238조원은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의 약 9% 규모다.
이를 위해 국가계약의 기본 원칙인 경쟁입찰과 사전 규격화를 일부 유예·완화하는 ‘3대 국가계약 혁신 트랙’을 신설한다.
개발·구매 연계형, 성과목표형, 시범특례인 조달샌드박스 등 세 가지다. 정부는 이를 통해 혁신기술의 R&D부터 공공구매까지 이어지는 과정에서 발생해온 제도적 단절을 줄인다는 계획이다.
현재 국가 R&D와 공공구매는 서로 다른 제도로 운영되고 있다. R&D는 국가연구개발혁신법에 따른 협약으로 진행하는 반면, 성과물을 실제 구매할 때는 국가계약법에 따라 별도의 계약 절차를 다시 거쳐야 한다.
개발을 마친 이후 규격을 확정하고 다시 경쟁입찰을 진행해야 해 기술 변화 속도가 빠른 첨단산업에서는 실제 현장에 투입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게 정부 판단이다.
기존 구매조건부 R&D나 혁신제품 제도도 운영되고 있지만 주로 중소·벤처기업의 초기 판로 지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대규모 공공수요나 국가전략기술 개발과 구매를 포괄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에 정부는 첫 번째 혁신 트랙으로 ‘개발·구매 연계형 계약’을 도입한다.
국가 R&D 개발 단계에서 공모를 통해 실질적인 경쟁을 거쳐 사업자를 선정했다면, 개발 성공 이후 성과물을 구매할 때 국가계약법상 경쟁 요건도 충족한 것으로 인정하는 방식이다. 다시 경쟁입찰을 거치지 않고 개발기업과 후속 구매계약을 체결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다만 모든 R&D 사업에 적용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전략기술 육성 특별법과 국가첨단전략산업법, 소재·부품·장비산업 특별조치법 등에 따른 국가전략·첨단기술 분야 가운데 소관 중앙관서가 신청하고 재경부 조달정책심의위원회의 의결을 거친 사업을 대상으로 한다.
R&D 최초 공고 때부터 개발에 성공하면 후속 구매가 가능하다는 내용과 성공 기준, 구매 범위와 기간 등을 미리 명시해야 한다.
구체적인 구매 물량과 가격은 기술개발 결과와 시장 상황 등을 반영해 실제 구매 시점에 정한다.
개발 목표 달성에 실패하거나 기술개발 기간 중 관련 수요가 사라진 경우, 또는 기술이 진부화한 경우에는 각 중앙관서에 설치하는 혁신계약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계약을 조정하거나 해지할 수 있도록 했다.
정부는 AI 로봇 공공보급을 대표적인 적용 사례로 제시했다. 산업통상부가 R&D를 담당하고 실제 활용기관인 경찰·소방청을 구매기관으로 사전에 연결한 뒤 공모를 진행하는 방식이다. 개발에 성공해 성과물이 나오면 경찰·소방청이 사전에 약정한 수량을 별도의 재입찰 없이 구매할 수 있다.
현재 휴머노이드와 4족 보행로봇 등 AI 로봇은 R&D 이후 원가 절감과 실증데이터 확보를 위해 양산과 공공보급이 필요하지만 현행 제도에서는 다시 경쟁입찰을 거쳐야 한다.
정부는 개발과 후속구매를 하나의 다년도 사업으로 연결하기 위해 R&D 예산과 구매예산을 연계한 다년도 계속사업, 다부처 통합예산 방식도 추진한다.
두 번째는 ‘성과목표형 계약’이다. 지금까지 공공조달은 발주기관이 제품이나 서비스의 세부 규격과 과업을 미리 정한 뒤 해당 조건을 충족하는 사업자를 선정하는 방식이 중심이었다.
하지만 기술 변화가 빠르고 사업 초기 단계에서 완성 형태를 예측하기 어려운 첨단산업에서는 이런 방식이 오히려 기술개발을 제약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정부는 기존 ‘경쟁적 대화에 의한 계약’을 확대해 발주기관이 구체적인 규격 대신 달성해야 할 성과목표를 제시하고, 민간기업과의 경쟁적 대화를 통해 기술적 해법을 찾아가는 ‘성과목표형 경쟁적 대화방식’을 신설한다.
계약 방식에도 6가지 유연성을 부여한다. 사전에 정확한 가격을 산정하기 어려울 경우 개산가격으로 계약한 뒤 사후 정산할 수 있도록 하고, 단순한 공정률이 아니라 사전에 정한 성과목표나 마일스톤 달성 여부에 따라 대금을 나눠 지급한다.
기술환경이 바뀌면 요구 성능이나 계약금액을 조정할 수 있도록 하고, 사업자가 신의성실 의무를 다했지만 기술적 한계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성실실패’에 대해서는 매몰비용을 인정하고 행정제재를 면제한다.
개발 과정에서 만들어진 지식재산권은 국가와 계약 상대방의 공동 소유를 원칙으로 하되 개발 기여도 등을 고려해 단독 소유도 허용할 수 있도록 한다.
정부는 우주발사체 사업을 성과목표형 계약의 대표 사례로 들었다. 우주항공청이 ‘발사단가 일정 금액 이하’, ‘저궤도 일정 중량 이상 수송서비스 제공’처럼 달성해야 할 목표를 제시하면 입찰기업들이 기술적 해법을 제안하고 경쟁적 대화를 거쳐 가장 우수한 제안서를 낸 기업과 계약을 체결하는 방식이다.
이후 개발 과정에서는 사후정산과 마일스톤별 대금 지급, 기술 변화에 따른 계약 변경 등을 허용한다.
성과목표형 계약의 활성화를 위해 공무원의 감사 부담도 줄인다. 혁신계약심의위원회의 심의·의결을 거쳤고 고의나 중과실이 없다면 계약 담당자의 책임을 묻지 않는 면책제도 도입을 추진한다.
조달청에는 별도 지원단을 설치해 성과지표 설계부터 경쟁적 대화, 제안서 평가, 마일스톤 관리까지 계약 전 과정을 지원한다.
세 번째는 ‘조달샌드박스’다. 정부는 현재 국가계약법 시행령에 있는 시범특례를 국가계약법상 제도로 격상하고 적용 범위도 대폭 확대한다.
현행 시범특례는 계약을 발주해 낙찰자를 결정하는 단계에만 특례를 적용할 수 있다. 앞으로는 예정가격 산정부터 계약보증금, 대금 지급, 계약금액 조정, 지체상금 등 계약 체결·이행 전반으로 규제 유예 범위를 넓힌다.
각 특례에는 기본 2년의 유효기간을 두고 실제 공공시장에서 안전성과 효율성이 확인되면 조달정책심의위원회 심의를 거쳐 국가계약법령에 정식 반영한다. 필요하면 특례기간을 연장할 수도 있다.
정부는 기존의 경쟁적 대화방식이 2018년 도입됐지만 계약이행 단계의 유연성 부족과 감사 부담, 복잡한 절차 등의 영향으로 제도 취지에 맞게 활용된 사례가 2건에 그쳤다고 설명했다.
해외에서는 이미 유사한 방식이 활용되고 있다. 미국은 미국항공우주국(NASA)과 국방부에 연방 계약법을 벗어난 계약 권한을 부여해 R&D 시제품이 성공하면 경쟁입찰 없이 후속 구매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유럽연합(EU)도 R&D와 구매를 하나의 절차로 연결하는 ‘혁신 파트너십’을 운영하고 있다.
정부는 3대 혁신 계약트랙 도입을 위한 국가계약법 개정안을 다음 달 마련해 발의할 계획이다.
국가계약법과 가칭 ‘신안보 혁신기업 육성 특별법’, 국방첨단전력사업법 등 이른바 ‘신안보 3법’의 제·개정도 함께 추진한다. 법 개정안 발의와 함께 시행령과 계약예규 등 하위법령 정비에 착수해 법이 통과되면 곧바로 제도를 시행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
내년부터는 조달청을 중심으로 3대 혁신 계약트랙을 적용할 수 있는 사업을 발굴하고 제도 운영 과정에서 나타나는 보완 과제도 지속적으로 점검할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