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검색, 기존 검색보다 전력 사용량 9배 이상…초고압 송전망엔 구리 5~7배 필요
광산·유전 투자는 10년 가까이 지연…수요 늘어도 2027~2028년 신규 공급 제한
당장은 구리·에너지, 내년엔 에너지·곡물 주목…엘니뇨 후퇴가 분기점
[더파워 이경호 기자] 인공지능(AI) 투자 열풍이 반도체를 넘어 원자재 시장까지 밀어 올릴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데이터센터가 늘어날수록 전력이 더 필요하고, 전력을 보내기 위해서는 송전망과 구리가 필요하다. 여기에 수년간 지연된 광산과 유전 개발까지 겹치면서 수요는 빠르게 늘지만 공급이 따라오지 못하는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그동안 AI 투자 사이클의 중심에는 GPU와 고대역폭메모리(HBM), 데이터센터가 있었다. 하지만 AI 인프라가 실제로 가동되기 시작하면 필요한 것은 반도체만이 아니다. 구리와 원유, 천연가스, 전력 등 실물 원자재가 다음 병목으로 떠오를 수 있다.
위 사진은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으로 AI(인공지능)를 활용해 생성된 가상의 이미지입니다.
6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최근 원자재 시장에서는 비철금속과 에너지를 중심으로 중장기 공급부족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유동성이 발생할 때 원자재 가격이 귀금속에서 비철금속, 에너지, 농산물 순으로 시차를 두고 움직였던 과거 흐름이 이번에도 재현될 수 있다는 판단이다.
원자재 가운데 가장 먼저 변화가 나타나는 곳은 구리다. 구리 가격은 최근 톤당 1만4000달러를 넘어섰고, 금융투자업계에서는 공급 부족과 AI 인프라 수요가 겹칠 경우 연내 1만6000달러선까지 추가 상승할 가능성이 제기됐다.
AI 산업화가 구리 수요를 직접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다. AI 기반 검색은 기존 검색엔진보다 9배 이상의 전력을 소비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데이터센터가 늘어날수록 발전설비뿐 아니라 전력을 옮길 송전망도 함께 늘어나야 한다.
특히 전력 손실을 줄이기 위해 초고압 송전설비 투자가 확대되면 구리 수요는 더 가파르게 증가한다. 초고압 송전망은 일반 전력망보다 km당 5~7배 많은 구리를 사용하는 것으로 추정됐다.
전기차 역시 구리 수요를 뒷받침하고 있다. 내연기관차에서 전기차로 자동차 산업의 중심이 이동하면서 차량 한 대에 들어가는 구리 사용량도 증가하는 구조다.
수요는 빠르게 증가하지만 광산 공급은 좀처럼 늘지 않고 있다. 문제의 출발점은 2010년대 초반이다. 구리 공급과잉이 발생했던 2013~2015년 이후 글로벌 광산업체들이 신규 개발 투자를 줄였고, 그 여파가 10년 가까이 지난 현재 생산능력 부족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분석이다.
노후 광산의 품위 하락도 부담이다. 글로벌 주요 광산은 광산 노후화와 구리 함량 저하로 생산 가이던스를 잇달아 낮추고 있다.
칠레를 비롯한 주요 생산국에서는 환경규제와 지역 주민 반발, 지진과 폭우 등 기상이변까지 광산 개발을 늦추고 있다. 신규 광산을 하나 개발하는 데 수년 이상이 필요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가격이 오른다고 곧바로 공급을 늘리기도 어렵다.
이 때문에 단순한 기상이변에도 구리 가격이 크게 움직이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공급 여유가 충분하다면 특정 광산의 일시적인 조업 차질은 가격에 큰 영향을 주지 않지만, 현재처럼 공급이 빠듯한 시장에서는 작은 생산 차질도 가격을 흔들 수 있다.
원유와 천연가스도 비슷한 상황이다. 글로벌 에너지기업들은 지난 수년간 탄소중립 기조와 투자 규제 영향으로 신규 유전 개발을 줄여왔다.
원유와 유정에서 함께 생산되는 수반가스 공급은 에너지기업의 자본투자를 약 7년 후행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과거 투자 감소가 이어졌던 점을 고려하면 2027~2028년까지 신규 공급이 제한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원유 공급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 세계 에너지원 가운데 화석연료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76%다. 유전 개발이 지연되면 원유뿐 아니라 천연가스 공급까지 동시에 압박받을 수 있다.
AI 데이터센터의 전력 사용량이 빠르게 늘어나는 가운데 발전연료 공급이 충분히 증가하지 못한다면 에너지 가격 부담은 다시 커질 수 있다. 반도체에서 시작된 AI 투자 사이클이 전력과 천연가스, 원유까지 연결되는 구조다.
중동 공급망의 불안도 변수다. 미국과 이란 간 휴전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지만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공급망 신뢰는 이미 크게 훼손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공급망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해협이 열렸느냐 닫혔느냐가 아니다. 보험사와 선사들이 해당 항로를 안전하다고 판단해야 실제 물류가 정상화될 수 있다. 한 번 훼손된 공급망 신뢰가 회복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
홍해가 대표적이다. 지정학적 충돌이 완화된 이후에도 선박 통행량이 과거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면서 상당수 선박이 희망봉 우회 항로를 계속 이용하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도 같은 길을 갈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다. 사우디아라비아와 UAE, 쿠웨이트, 이라크 등이 해협을 우회하는 송유관 확충에 나서는 것도 특정 항로 의존도를 낮추려는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유정 자체의 생산성도 문제다. 페르시아만 인근 일부 유정은 장기간 가동이 중단된 상태인데, 유정을 오랫동안 폐쇄하면 내부 압력 감소와 지층수 유입으로 생산성이 훼손될 수 있다.
관련 분석에서는 장기간 폐쇄된 유정의 생산성이 최소 10% 이상 떨어질 수 있고 상황이 악화될 경우 최대 25%가 영구적으로 훼손될 가능성도 제시됐다. 전쟁이 끝나고 수출항이 다시 열려도 생산량이 즉시 원상복구된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다.
러시아와 미국 역시 공급 확대 여력이 제한적이라는 평가다. 러시아는 정유시설에 대한 공격으로 일부 생산과 수출에 차질을 빚고 있고, 미국 셰일업체도 유가 수준에 비해 신규 유전 개발 속도가 과거만큼 빠르지 않다.
베네수엘라 역시 단기간에 대규모 공급 확대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생산능력을 하루 30만배럴가량 늘리는 데도 최소 2년 이상이 필요할 것으로 분석됐다.
이런 공급 환경을 감안하면 유가가 조정을 받더라도 중장기적으로 다시 상승할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금융투자업계에서는 내년까지 원유시장의 공급 부족이 이어지면서 유가가 다시 사상 최고 수준을 시험할 수 있다는 시각도 제시하고 있다.
다만 원자재가 동시에 오르는 것은 아니다. 이번 사이클에서도 시차가 존재한다.
원자재는 과거 유동성이 확대될 때 귀금속에서 비철금속, 에너지, 농산물 순으로 상승한 사례가 반복됐다. 2020년 금 가격이 먼저 고점을 형성한 뒤 구리 등 비철금속이 상승했고 이후 원유와 천연가스가 강세를 보였던 흐름이 대표적이다.
현재는 금보다 구리의 상대적인 강세가 더 뚜렷하다. 금 가격은 사상 최고치에서 내려온 뒤 반등하고 있지만 전고점을 다시 넘어설 가능성에 대해서는 신중한 전망이 나온다.
글로벌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이 다시 긴축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 금에는 부담이다. 금은 유동성을 먼저 반영하는 자산인 만큼 금리 상승과 유동성 축소에 상대적으로 민감하다.
중국의 금 매입도 과거처럼 가격을 강하게 끌어올릴 정도는 아니라는 분석이다. 중국 인민은행이 금 보유량을 계속 늘리고 있지만 과거보다 증가 속도가 둔화된 데다 중국 개인투자자의 공격적인 금 매수도 이전보다 약해졌다.
반대로 비철금속과 에너지는 유동성을 상대적으로 늦게 반영한다. 금 가격이 먼저 움직인 뒤 일정한 시차를 두고 구리와 원유가 따라가는 패턴이 다시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기상이변도 원자재 사이클의 속도를 조절하는 변수다. 현재 동태평양 해수면 온도는 평년보다 약 2.2도 높은 슈퍼 엘니뇨 상태로 분석됐다.
엘니뇨가 발생하면 북반구 겨울 기온이 평년보다 높아질 가능성이 커진다. 난방용 천연가스와 석탄 수요가 줄어들 수 있어 에너지 가격의 상단을 제한하는 요인이다.
곡물에도 엘니뇨가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미국 중부와 브라질 서남부, 아르헨티나 등 주요 옥수수·대두 생산지역의 강우량을 늘려 작황을 개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곡물 가격의 본격적인 상승 시점은 당장보다는 내년으로 예상됐다. 슈퍼 엘니뇨가 내년 1분기를 전후로 정점을 통과한 뒤 4월 이후 후퇴할 경우 에너지와 곡물 가격을 억누르던 요인이 사라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엘니뇨가 약화되면 천연가스 가격 상승이 다시 비료와 전력, 비철금속으로 확산될 가능성도 있다. 천연가스와 석탄 가격이 오르면 전력비가 상승하고, 이는 광산과 제련소의 생산비용을 높인다.
비료 가격도 같은 경로로 움직일 수 있다. 천연가스와 원유 가격 상승이 질소계·인산계 비료 가격으로 전가되고 농가 생산비 증가로 이어지면 곡물 가격까지 자극할 수 있다.
반면 엘니뇨 자체가 호재인 원자재도 있다. 코코아와 커피, 원당, 천연고무 등 이른바 소프트 원자재다.
엘니뇨가 발생하면 서태평양 지역의 강우량이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 로부스타 커피 주요 생산국인 베트남과 코코아 산지인 인도네시아, 천연고무 생산국인 태국 등이 가뭄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특히 코코아는 다른 농산물과 달리 연중 수확이 이어지는 만큼 기상이변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을 가능성이 높다. 주요 기관들은 2026~2027년 세계 코코아 공급우위 전망을 기존 26만7000톤에서 14만9000톤으로 낮춘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원자재 시장의 다음 국면은 ‘무엇이 먼저 오르느냐’의 문제에 가깝다. 당장은 AI와 전력망 투자의 직접적인 수혜를 받는 구리를 포함한 비철금속과 공급 불안이 이어지는 에너지가 상대적으로 유리하고, 내년 엘니뇨가 약화되면 에너지와 곡물까지 상승 흐름이 확산될 수 있다는 전망이다.
이번 원자재 사이클의 가장 큰 특징은 수요와 공급의 속도가 다르다는 점이다. AI 데이터센터와 전력망 투자는 빠르게 진행되고 있지만 광산과 유전은 짧은 시간에 새로 만들 수 없다.
반도체 공장은 몇 년 안에 증설할 수 있어도 광산과 유전은 탐사부터 허가, 개발, 생산까지 훨씬 긴 시간이 필요하다. 지난 10여년간 줄어든 투자가 지금의 공급 제약으로 돌아오는 이유다.
AI 산업화가 과거 중국의 산업화와 비슷한 원자재 수요 충격을 만들 가능성이 제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성장하던 시기 철광석과 구리, 에너지 수요가 급증했던 것처럼 AI 역시 전력과 송전망, 발전연료를 동시에 요구하고 있다.
결국 AI 투자 사이클을 반도체 업황만으로 판단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GPU와 HBM 다음에 필요한 것은 전력이고, 전력을 만들고 옮기기 위해서는 천연가스와 원유, 구리가 필요하다.
시장은 이미 구리에서 그 변화를 먼저 반영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에너지와 농산물까지 순차적으로 움직인다면 이번 AI 사이클은 기술주 상승에 그치지 않고 원자재 가격까지 다시 끌어올리는 장기 투자 사이클로 확장될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