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록의 책을 통해 세상 읽기] 정의길의 '지정학의 포로들-2/3'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유럽 국가에서 미·소가 세계 강국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1942년 가을, ‘대형망치 작전’을 통해 서부 전선에서 독일군을 압박하려 했으나, 영국 반대와 피해를 우려하여 실행되지 못했다. 소련은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연합국의 제2전선 지연에 대해 점차 불신을 갖게 되었다.
독일군이 크게 약화된 1944년 6월에서야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하여, 스탈린은 서방에 대한 불신과 냉소를 키웠다. 전후 보상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 역시 소련의 의구심을 자극했다. 미국이 전후 질서에 대한 명확한 태도를 밝히지 않자, 스탈린은 동유럽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이후 냉전의 시작을 알리는 첫 발걸음이 되었고, 동서 진영 간 갈등이 드러나게 되었다.
소련은 동유럽을 위성국으로 삼아 완충지대를 확보하고, 자국 안보를 강화하려 했다. 이는 불안정의 씨앗이 되었고, 유지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 특히 미국의 봉쇄 정책을 자극하면서, 소련 팽창과 미국 대응으로 냉전이라는 두 번째 ‘그레이트 게임’이 시작되었다.
소련 봉쇄 전략은 조지 캐넌과 니컬러스 스파이그먼의 이론에 기반한 것으로, 소련의 팽창이 안보 불안을 불식하려는 본능적인 행동으로 해석했다. 캐넌은 소련을 장기적으로 봉쇄한다면, 내부 취약성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붕괴할 것이라 예견했다.
베를린 위기는 냉전 초기 양 진영 간 갈등이 고조된 사건 중 하나로, 상대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한 봉쇄와 돌파 전략의 상징이 되었다. 1948년 소련은 서방이 서독에 통화 도입과 경제적 부흥 계획에 반발하여 베를린을 봉쇄했다. 미·소 간 상호 불신과 공포를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두 번째 그레이트 게임이 본격화되었고, 한국에서 전쟁은 최초의 군사적 충돌이 되었다.
1957년 소련은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발사하며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냉전의 새로운 국면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해 소련은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에도 성공하여, 양국 간 군비 경쟁을 더욱 격화시켰다. 이후 양국은 공포의 균형을 이루게 되었고, 냉전의 긴장 상태를 지속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은 중국과 관계 개선을 통하여 소련을 압박하는 새로운 전략을 펼쳤다. 소련은 두 개 전선에서 도전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국력 소모를 가중했다. 미국과 군비 경쟁 완화와 군축 논의에 나서게 되었으며, 핵무기 경쟁을 완화하기 위한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데탕트 시기는 냉전의 일시적인 완화기로, 냉전을 평화로 대체하기보다는 양국이 불안정한 군비 경쟁을 통제하고 우발적인 충돌을 방지하려는 성격이 강했다.
1975년 헬싱키 조약은 데탕트의 대표적인 결과물 중 하나로, 서방은 소련 세력권을 인정하는 대신 인권 보장을 약속받았다. 헬싱키 조약은 소련 제국이 균열을 겪기 시작한 첫 단추로 평가되며, 이후 동유럽 사회에 인권과 자유에 대한 열망이 커지게 되었다.
1979년 오일 쇼크는 자본주의 진영의 경기침체를 초래했으나, 산유국인 소련 경제에는 호황을 가져다주었다. 서방은 경제 패러다임을 지식산업으로 전환하며 혁신을 추구했지만, 소련은 낙후된 중공업 체제를 유지하고 제3세계 팽창에 국력을 소모했다. 소련 현대사가 스티븐 코트킨은 오일 쇼크를 두고 "역사의 잔인한 속임수"라며, 소련 몰락을 예견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한다.
특히,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냉전의 마지막 대결로 불린다. 미국은 아프간을 베트남처럼 대리전장으로 만드는 공작을 하였다. 파기스탄 핵 개발을 용인한 입장도 마다하지 않았다. 소련의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켰고, 이후 석유 가격 하락과 지도부의 고령화로 인해 소련 체제는 심각한 흔들림을 겪는다.
1983년 9월 1일 우리에게 불행한 대한항공기 격추 사건은 미·소간 대립의 결과이며, 또한 핵전쟁 공포를 극대화한다. 앞서 미군 RC-135기가 이 지역에 출현해 소련 대륙간탄도미사일 실험을 정찰했고, 소련은 미국 정찰기로 오인해 격추시켰다. 그해 봄부터 미 태평양 함대가 이 지역에서 군사훈련을 하면서, 미군 전투기들이 여러 차례 소련 영공을 침범해서 소련 고위 장교들이 질책을 당했었다.
이를 두고 주미 소련 대사가 “양측은 조금씩 미쳐가고 있었다”라고 평했다. 그해 11월 초 나토 연례군사훈련을 놓고 쿠바 미사일 위기에 준하는 핵전쟁 위기가 있었다. 예년과 달리 대통령과 부통령 등 미국 최고위급 인사들이 참관했다. 핵무기의 전면적 사용을 상정하는 훈련도 포함됐다. 동독 소련군 기지에서 핵무장을 한 전투기들이 비상대기 상태로 들어갔다. 12월 소련 군축 협상팀이 철수하고, 두 나라는 15년 만에 처음으로 어떤 형태의 협상도 하지 않게 되었다.
1990년 2월 9일 모스크바에서 베이커 국무장관은 “통일 독일은 변화된 나토에 고정된다. 나토 관할 영역은 동쪽으로 1피트도 전진하지 않겠다”라고 했다. 그러나 나토는 동진을 계속하여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이르게 되었다.
영·러의 1차 그레이트 게임에서 한반도가 종료 무대가 된 것에 비해, 미·소의 2차 게임은 6.25 전쟁으로 본격화된다. 독일 통일로 끝났지만, 중국과 3차 대결이 기다리고 있다.
글: 이병록 예비역 제독·정치학 박사·덕파통일안보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