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파워 이설아 기자] 기업이 커질수록 각종 규제와 세 부담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이른바 ‘성장 페널티(Growth Penalty)’가 한국 경제의 성장 잠재력을 잠식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대한상공회의소 SGI(지속성장이니셔티브)는 한국 경제의 저성장 원인을 구조적으로 분석한 결과, 기업 규모별 차등 규제와 경직된 노동시장이 결합해 국내총생산(GDP)의 4.8%, 약111조원의 손실을 초래하고 있다고 밝혔다.
SGI는 프랑스의 기업규모별 규제 효과를 분석한 기존 구조적 모형을 한국 상황(50인·300인 규제)에 맞게 수정해 추정한 결과, 기업들이 50인·300인 규제 구간을 넘지 않기 위해 성장을 의도적으로 멈추거나 회사를 쪼개는 ‘안주 전략(bunching)’이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천구 SGI 연구위원은 “기업 규모에 따른 차별적 규제가 기업의 손발을 묶는 족쇄라면 경직된 노동시장은 그 충격을 완충하지 못하고 경제 전반으로 확산시키는 증폭기 역할을 하고 있다”며 “성장을 가로막는 규제와 노동 경직성이 결합해 우리 경제가 감당하기 힘든 청구서로 돌아온 셈”이라고 말했다.
기업 생태계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진입-성장-퇴출’ 사다리도 크게 훼손된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에 따르면 소기업이 5년 뒤에도 10~49인 규모에 머무는 비율은 최근 60%에 육박해 1990년대 40%대에서 크게 높아졌다.
소기업이 중규모 기업으로 도약할 확률은 과거 3~4%에서 최근 2%대로 떨어졌고, 대기업으로 성장할 확률은 0.05% 미만으로 사실상 사라졌다. 한편 과거 60% 수준이던 퇴출률은 40% 아래로 내려가 경쟁력을 잃은 기업조차 시장에서 버티는 ‘좀비 기업’ 현상이 심화된 것으로 분석됐다.
생산성과 고용 구조도 왜곡됐다. SGI는 한국 제조업에서 소기업(10~49인)의 노동생산성이 대기업의 30.4% 수준에 그쳐 OECD 국가 중 격차가 가장 크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소기업 고용 비중은 42.2%로 OECD 평균 22.7%의 두 배에 가까운 반면, 대기업(250인 이상)의 고용 비중은 28.1%로 OECD 평균 47.6%의 절반 수준에 머무르고 있어, 저생산성 부문에 인력이 과도하게 묶이는 구조가 고착되고 있다는 것이다.
SGI는 저생산성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 △성장 아니면 퇴출을 전제하는 ‘Up-or-Out’ 지원 체계 구축 △담보 대출 중심에서 투자 중심으로의 자금 조달 생태계 전환 △기업 성장에 인센티브를 주는 조세·지원제도 재설계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성과가 검증된 기업에는 매출·고용 증가율 등 혁신 지표에 연동해 지원 한도를 과감히 늘리고, 혁신 의지가 없는 기업에는 지원을 중단하는 성과 연동형 구조로 바꾸자는 취지다. 또 담보 위주 은행 대출에 의존하는 현재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탈(CVC) 규제 완화, 민간 모태펀드 활성화 등을 통해 모험자본 공급을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세·지원 체계와 관련해 보고서는 기업이 일정 규모를 넘으면 각종 규제와 의무가 급격히 증가하는 ‘계단식 규제’가 성장 의지를 꺾고 있다며, 기업 규모와 무관하게 적용되는 기본공제를 도입하고 투자·고용 등 경제 기여도에 비례해 추가 공제 혜택을 주는 방식의 ‘성장 유인형’ 제도로의 전환을 주문했다.
박정수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가 기업 성장을 저해하는 구조적 문제를 인식하고 대책을 내놓기 시작한 것은 긍정적이지만 관건은 현장에서의 속도감 있는 이행”이라며 “규제와 조세 제도를 과감히 재설계해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생산성을 끌어올릴 수 있는 유인체계를 다시 세워야 한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