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회장이 10일 사회적가치연구원이 개최한 '2026 가치와 성장 포럼'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사회적가치연구원
[더파워 이설아 기자] 기존 수출 주도 성장 방식만으로는 저성장과 양극화, 사회갈등 등 한국 경제가 직면한 구조적 문제를 풀기 어렵다는 진단과 함께 사회적 가치를 성장 시스템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제언이 나왔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지난 10일 저성장과 양극화, 사회갈등 해소를 위해 사회적 가치와 환경 가치를 포함한 새로운 성장 모델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사회적가치연구원은 11일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윤호중 행정안전부 장관이 전날 서울 한국고등교육재단 컨퍼런스홀에서 열린 ‘2026 가치와 성장 포럼’에 참석해 이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했다고 밝혔다.
최 회장은 대담에서 “지금까지의 성장 방식은 사회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일부의 성장에 머물렀다”며 “성장과 가치를 종합하는 새로운 모델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 경제가 직면한 문제는 단순한 성장 둔화가 아니라 내수 부족과 사회적 비용 증가가 동시에 작동하는 구조적 문제”라며 “GDP 성장률만 높이는 방식으로는 분배 문제와 사회 문제를 더 키울 수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과거 한국 경제의 성공 공식이 더 이상 그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봤다. 최 회장은 “과거 한국은 수출 주도 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뤄내며 성공했지만 지금은 인구 문제와 양극화, 내수 부진 같은 약점이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며 “앞으로의 성장 모델은 경제 성장과 사회적 비용 감소를 동시에 달성하는 방향으로 재설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 회장은 사회적 가치를 도덕적 선택이 아닌 자본주의 지속 가능성과 연결된 문제로 규정했다. 그는 “사회적 가치는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생존 문제일 수 있다”며 “사회문제가 커질수록 정부가 감당해야 할 비용도 커지고 결국 성장의 발목을 잡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사회 불행을 줄이고 행복을 창출하는 일이 보상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가가 핵심 질문”이라며 “그 보상이 제대로 작동하면 사회문제 해결이 늘어나고 결과적으로 사회 저비용 구조를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과정에서 측정과 보상 체계의 중요성도 거듭 언급했다. 최 회장은 “착함이라는 선한 마음에만 의존해서는 역부족”이라며 “사회 문제 해결 활동을 정량적으로 측정하고 이를 토대로 인센티브를 제공하면 기업과 다양한 경제 주체의 참여를 확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처음에는 사회적 가치를 어떻게 측정하느냐가 가장 큰 도전이었다”며 “회계도 처음부터 정교했던 게 아니듯 사회적 가치 측정도 점점 객관성과 정확성을 높여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최 회장은 SK가 2015년부터 추진해온 사회성과인센티브 실험도 소개했다. 사회적 기업이나 조직이 창출한 사회적 가치를 측정해 성과에 따라 보상하는 방식이다. 사회적가치연구원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SPC 프로젝트에는 468개 기업이 참여해 5364억원 규모의 사회적 가치를 창출했고, 이에 비례해 769억원의 현금 인센티브가 지급됐다. 연구원은 참여 기업이 미참여 기업보다 사회적 성과를 약 3배 더 창출했고, 매출도 평균 34% 높았다고 설명했다.
윤호중(가운데) 행정안전부 장관과 최태원(왼쪽) SK그룹 회장이 10일 열린 ‘2026 가치와 성장 포럼’에서 대담을 하고 있다./사회적가치연구원
최 회장은 새 성장 모델의 성패가 참여자 확대에 달려 있다고도 강조했다. 그는 “성장을 다시 설계하려면 기업과 정부, 사회적 기업, 소셜벤처, 시민사회가 모두 같은 방향으로 정렬돼야 한다”며 “구성원에게 인센티브가 없으면 어떤 제도도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사회적 경제 참여 인구가 1000만명 수준까지 늘어나면 경제활동인구 3000만명의 3분의 1이 새로운 가치 창출에 참여하는 셈”이라며 “그 자체가 한국 경제의 새로운 GDP 성장 기반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환경 문제 역시 같은 논리로 접근해야 한다는 게 최 회장 설명이다. 그는 “환경을 덜 침해하고 만든 결과에 보상을 주는 체계를 만들면 기업은 규제를 피하는 데 머리를 쓰는 대신 문제를 줄이는 데 자원을 투입하게 된다”며 “사회적 가치와 환경 가치를 성장 시스템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또 “GDP는 사회적 가치나 환경 가치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며 새로운 성장 지표 논의 필요성도 제기했다.
인공지능(AI)도 새로운 성장 모델의 도구로 제시했다. 최 회장은 “AI를 활용한 사회적 기업이 대거 등장하면 사회문제를 더 낮은 비용으로 해결하면서 경제 성장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며 “이제는 한 마리 토끼만 쫓아서는 안 되고 최소 두세 마리를 동시에 잡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 같은 저성장 늪에서 벗어나려면 부작용 가능성이 있더라도 새로운 제도를 밀고 갈 각오가 필요하다”며 “허깨비 같은 성장 숫자만 좇지 말고 성장의 목표 자체를 새롭게 설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윤호중 장관도 정부와 민간이 함께 작동하는 새로운 성장 생태계 필요성에 공감했다. 윤 장관은 “성장을 위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사람과 공동체의 회복에서 시작돼야 한다”며 “이를 위해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한 사회연대경제를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 “정부는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모든 구조를 설계하는 역할을 맡고, 현장 혁신과 확장은 기업과 시장의 역동성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이번 포럼은 ‘정책가와 기업가의 솔루션 찾기’를 주제로 열렸으며, 장용석 연세대 교수가 대담을 진행했다. 사회적가치연구원은 이번 논의가 더 많이 생산하고 더 크게 성장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사회적 가치가 성장의 조건이 될 수 있는지 본격적으로 논의하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