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형 수익률 3.53% 그쳐…DC형 8.47%·IRP 9.44%와 격차
공공형·비영리 연합형·금융기관 개방형 도입 논의…‘선택하지 않아도 운용’ 구조가 관건
/연합뉴스
[더파워 이경호 기자] 퇴직연금 적립금이 500조원을 넘어섰지만 전체 자금의 4분의 3은 여전히 원리금보장상품에 묶여 있다.
가입자가 직접 금융상품을 고르고 교체하도록 한 현행 운용 구조가 장기수익률과 노후소득 보장이라는 퇴직연금의 본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지 못하면서, 전문조직이 자금을 통합 운용하는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 논의가 본격화하고 있다.
자본시장연구원이 발간한 ‘자본시장포커스 2026년 14호’에 따르면 지난해 말 국내 퇴직연금 적립금은 501조4000억원으로 집계됐다. 제도별로는 확정급여형(DB) 228조9000억원, 확정기여형(DC) 141조6000억원, 개인형퇴직연금(IRP) 130조9000억원이다.
외형은 빠르게 커졌지만 운용 방식은 제자리다. 전체 적립금 가운데 원리금보장형 상품 비중은 75.4%에 달했다. DB형은 적립금의 91.9%가 원리금보장형에 집중됐고 DC형과 IRP도 각각 67.0%, 55.7%를 차지했다.
운용 방식에 따른 수익률 격차도 벌어졌다. 지난해 연간 수익률은 DB형이 3.53%에 그친 반면 DC형은 8.47%, IRP는 9.44%를 기록했다. 실적배당형 상품의 최근 5년 평균 수익률도 5.37%까지 높아졌다.
다만 DC형과 IRP의 높은 수익률을 개인 선택 방식의 성과로만 해석하기는 어렵다. 가입자가 장기간 자산배분과 상품 선택, 위험관리, 리밸런싱을 반복해야 하는 구조에서는 금융지식과 관심도에 따라 가입자 간 성과 격차가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입자가 상품을 고르지 않거나 기존 상품을 방치하면 적립금이 현금성 자산과 원리금보장상품에 머무는 문제도 반복됐다. 운용책임은 개인에게 넘겼지만 합리적인 장기투자를 지원하는 제도적 장치는 충분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기금형 퇴직연금은 개별 가입자의 상품 선택을 전문 운용조직의 장기 운용으로 전환하는 방식이다. 수탁법인 이사회가 목표수익률과 위험한도, 운용지침을 정하고 전문운용조직이나 위탁운용사가 자산배분과 운용사 선정, 리밸런싱을 맡는다. 독립된 자산관리기관은 자산 보관과 급여 지급을 담당한다.
가입자가 여러 금융상품을 직접 탐색하는 대신 어떤 기금에 가입할지를 선택하고, 기금이 자산을 전문적으로 운용하도록 책임 구조를 바꾸는 것이다. 개인의 선택권은 유지하되 상품 단위의 반복적인 선택 부담을 줄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자본시장연구원은 현행 사전지정운용제도가 실질적인 디폴트 구조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고 짚었다. 가입자가 사전에 상품을 선택해야 운용이 시작되는 방식은 ‘옵트인’에 가깝기 때문이다. 가입자가 아무런 선택을 하지 않아도 전문적으로 자금이 운용되고, 원할 때 다른 상품이나 기금으로 이동할 수 있는 ‘옵트아웃’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 논의는 2014년부터 이어졌다. 당시 관련 방안이 입법예고와 부처 협의, 국무회의를 거쳤지만 국회 회기 종료로 폐기됐다. 이후 노사정 논의를 거쳐 올해 2월 기금형 제도 도입을 위한 공동선언이 나왔고, 고용노동부를 중심으로 입법과 시행 방안 마련이 진행되고 있다.
현재 논의되는 기금은 공공형과 비영리 연합형, 금융기관 개방형 등 세 가지다. 기존 계약형 퇴직연금을 모두 기금형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지배구조가 병존하도록 한다는 구상이다.
공공형은 민간 퇴직연금 시장이 충분히 포괄하지 못한 중소·영세 사업장 근로자의 가입 사각지대를 줄이고 최소한의 수급권을 보호하는 데 목적이 있다. 기금 규모를 무조건 키우기보다 가입률과 적립 지속성, 비용, 수익률을 함께 평가해야 한다.
비영리 연합형은 같은 산업이나 업종, 지역에 속한 사업장이 공동기금을 조성해 규모의 경제를 확보하는 방식이다. 노사는 기금의 전략과 감독에 참여하되 실제 자산 운용은 독립된 전문조직이 맡는 구조가 요구된다. 가입과 탈퇴, 기금 간 이동, 적립금 이전, 성과 배분 기준도 사전에 명확히 해야 한다.
금융기관 개방형은 자산운용과 위험관리, 전산, 판매망 등 기존 금융회사의 인프라를 활용해 장기수익률을 높이는 유형이다. 다만 금융그룹 계열상품을 과도하게 편입하거나 기금보다 금융회사의 이익을 앞세울 가능성을 막기 위한 이해상충 통제가 필요하다.
세 유형을 동일한 기준으로 평가해서도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공형은 가입 사각지대 해소와 수급권 보호, 비영리 연합형은 공동기금의 지속성과 대표성, 금융기관 개방형은 위험을 고려한 장기수익률과 비용 효율성을 핵심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전문운용조직의 독립성과 투명한 성과 공시, 가입자의 기금 이동권도 제도에 포함돼야 한다. 장기 저성과가 이어지는 기금에는 시정조치를 내리고 개선되지 않을 경우 시장에서 퇴출할 수 있는 규율도 필요하다.
기금형 제도가 도입되더라도 기존 계약형 퇴직연금은 상당 기간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 이에 따라 사전지정운용제도 개선과 DB형 적립금의 일임운용 확대, 퇴직연금사업자 평가와 비교공시 강화도 함께 추진해야 한다는 주문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