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자를 그린 것이 아니라 세종의 생각을 그리다
사진제공=송림아트센터[더파워 최성민 기자] 금보성비엔날레의 중심에는 한글이 있다.
그러나 전시장에 펼쳐진 것은 자음과 모음을 그려 놓거나 흩어 놓은 문자 그림이 아니다. 금보성이 화면에 옮기려 한 것은 글자의 외형이 아니라 세종의 생각이다.
왜 ‘ㄱ’은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가. 왜 우리는 그것을 ‘기역’이라 부르는가. 자음과 모음은 어떤 생각과 원리에서 태어났는가.
그래서 그의 작품은 문자를 장식하는 그림보다 오래 봉인된 고서를 다시 펼쳐 읽는 일에 가깝다. 한 점의 작품이 하나의 장면이라면, 40여 년의 작업은 한글의 속내를 추적해 온 거대한 주석이자 회화로 쓰인 경전과도 같다.
금보성이 한글회화의 제왕으로 불릴 수 있는 이유를 단지 ‘먼저 시작했다’는 시간의 문제에서만 찾아서는 안 된다.
그는 자음과 모음의 외형을 차용하는 데 머물지 않았다. 문자가 만들어진 이유와 구조를 질문하고, 그 안에 잠겨 있던 정신과 조형성을 색과 선, 면과 공간으로 끌어냈다.
이것이 금보성비엔날레가 말하는 ‘봉인의 해제’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이유는 글자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스스로 뜻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백성을 위한 문자였다. 그 중심에는 사람이 있었고, 소통이 있었으며, 자연과 인간을 바라보는 당대의 사유가 있었다.
세종은 자연의 질서를 문자 안에 담고, 그 문자를 통해 사람이 사람과 소통하게 했다면, 금보성은 문자를 베껴 그리는 것이 아니라 문자가 태어나기 이전의 생각을 추적한다. 완성된 글자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글자를 가능하게 했던 원리를 찾아갔다.
글자를 그린 것이 아니라, 글자가 태어난 생각을 그리는 것이다.
금보성비엔날레가 한글비엔날레로 읽힐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시의 목적이 한글의 형태를 나열하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글의 창제 정신과 자음·모음의 구조를 현대미술의 시각언어로 다시 열어, 한국인에게는 너무 익숙해서 잊었던 문자의 깊이를 되묻고 세계인에게는 한글이라는 문명이 품은 사유를 미술로 경험하게 한다.
한글을 읽지 못하는 세계인도 작품 앞에서 600년 전 조선에서 만들어진 문자이며, 백성을 향한 소통의 의지에서 출발했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한다.
여기에 금보성비엔날레의 세계성이 있다.
세계에 한글을 알린다는 것은 ‘한글은 위대한 문자’라고 반복해서 외치는 일이 아니다. 왜 이런 문자가 태어났는지를 보여주는 일이다.
세종은 백성을 위해 문자로 소통의 길을 열었음에도 우리는 한글을 읽으면서도 정작 한글의 속내를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40여 년의 한글회화는 자음과 모음의 겉모습을 그려 온 시간이 아니라, 문자 안에 봉인된 조형과 정신을 추적해 온 시간이다. 그리고 이제 그 축적을 비엔날레라는 장에서 세계와 대면시키고 있다.
문자를 전시하는 것이 아니다. 문자 속의 생각을 꺼내 맛보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해제된 한글을 다시 세계 현대미술의 언어로 파종하는 것이다.
금보성비엔날레는 한글을 소재로 삼은 비엔날레를 넘어, 600년 전 세종의 문자와 오늘의 현대미술을 연결하며 한글의 미학을 세계에 묻는 비엔날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이제 시작됐다.
최성민 더파워 기자 Sungmin@thepower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