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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OPHOLE', 기존 시스템의 틈에서 새로운 경로를 탐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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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OPHOLE', 기존 시스템의 틈에서 새로운 경로를 탐색하다

최성민 기자

기사입력 : 2026-09-18 11:48

한국·라트비아·리투아니아 작가 8인이 참여하는 국제 기획전

《LOOPHOLE》 전시 전경, 2026. Photo by Lim Janghwal.1
《LOOPHOLE》 전시 전경, 2026. Photo by Lim Janghwal.1
[더파워 최성민 기자] 기존의 규칙과 시스템이 더 이상 온전히 작동하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새로운 경로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기획전 《LOOPHOLE》은 이러한 질문을 출발점으로 한국과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서 활동하는 작가 8인의 작업을 한자리에 선보인다.

전시 제목인 ‘LOOPHOLE’은 법이나 규제의 허점을 활용해 기존의 공식적인 경로를 벗어나는 방법을 의미한다. 《LOOPHOLE》은 이 개념을 단순한 편법이나 예외적인 상황에 한정하지 않고, 주어진 조건 안에서 다른 가능성을 찾아내는 하나의 방법으로 확장한다. 작가들은 익숙한 사물과 규범을 다른 방식으로 활용하거나, 제한된 조건 속에서 새로운 소통과 이동의 방식을 만들어낸다.
《LOOPHOLE》 전시 전경, 2026. Photo by Lim Janghwal.2
《LOOPHOLE》 전시 전경, 2026. Photo by Lim Janghwal.2

특히 이번 전시에서 중요한 것은 ‘우회’와 ‘이동’의 관계다. 이동은 단순히 국경을 넘거나 작품이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지는 물리적인 과정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의 작업이 새로운 사회와 문화적 환경, 그리고 다른 관객과 만나는 과정 역시 일종의 이동으로 볼 수 있다. 서로 다른 맥락을 통과한 작품은 새로운 방식으로 읽히며, 그 과정에서 이전과 다른 관계와 의미를 만들어낸다.

《LOOPHOLE》은 한국과 발트 지역을 서로 다른 국가의 사례로 병렬적으로 보여주는 데 머물지 않는다.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한국에서 출발한 작업들이 한 공간에서 만나면서 발생하는 교차와 변화를 살펴본다. 서로 다른 역사적·사회적 조건 속에서 만들어진 작업이 새로운 장소로 이동하고 다른 작업 및 관객과 관계를 맺으면서 어떤 의미의 변화를 만들어내는지가 전시의 주요 관심사다.
《LOOPHOLE》 전시 전경, 2026. Photo by Lim Janghwal.3
《LOOPHOLE》 전시 전경, 2026. Photo by Lim Janghwal.3

전시는 1990년대 이후 체제 전환을 경험한 발트 지역의 역사적 맥락에서도 출발한다.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하고 새로운 사회·경제 시스템이 구축되는 과정에서 공식적인 제도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했고, 사람들은 생필품과 정보, 문화에 접근하기 위해 다양한 비공식적 경로를 찾아야 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오늘날의 사회에서 발견되는 여러 우회적 경로와도 느슨하게 연결된다. 부업과 개인 브랜딩, 온라인 정체성, 디지털 커뮤니티 등 기존 시스템에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새로운 경로를 만들어가는 현상 역시 주어진 조건에 대한 하나의 대응 방식으로 볼 수 있다.

이번 전시에는 라트비아의 루돌프스 스타메르스(Rūdolfs Štamers), 아놀즈 앤더슨(Arnolds Andersons), 이리사 에르브세(Īrisa Erbse), 카스파르스 그로셰브스(Kaspars Groševs), 카를리나 메제츠카(Karlīna Mežecka), 리투아니아의 미콜라스 발란티나스(Mykolas Valantinas), 한국의 듀킴(Dew Kim), 이은솔(Eun-sol Lee) 등 총 8명의 작가가 참여한다.

루돌프스 스타메르스는 산업 자재와 반사면, 이미지 등을 결합해 가설적 구조물을 만들고, 개별 작품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공간을 구성한다. 《Same, Same, but Different》는 여러 작업을 연결하는 하나의 환경으로 기능한다.
《LOOPHOLE》 전시 전경, 2026. Photo by Lim Janghwal.4
《LOOPHOLE》 전시 전경, 2026. Photo by Lim Janghwal.4

이리사 에르브세와 카스파르스 그로셰브스는 《Shimmering & Shivering》을 통해 이동과 소통의 문제를 다룬다. 물리적인 이동이 제한된 상황에서도 회화와 음향, 카세트테이프 등의 매체를 활용해 시공간과 언어의 장벽을 넘어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을 제시한다.

아놀즈 앤더슨은 1990년대 리가에서의 기억을 바탕으로 사회적 변화와 남성성의 이미지를 탐구하며, 카를리나 메제츠카는 도자와 유리를 결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파손과 잔존, 우연성의 관계를 시각화한다.

미콜라스 발란티나스의 《No Suppression》은 아버지가 그린 풍경화를 찾아가는 여정을 중심으로 진품과 위작, 원본과 복제 사이의 경계를 다룬다. 작품에는 위조지폐와 실제 위조범의 음성 등이 활용된다.

듀킴은 종교적 도상과 신체, 퀴어 섹슈얼리티를 결합해 기존의 창조론과 가족 서사를 새롭게 바라본다. 이은솔은 가상 인물 ‘Kimberly Lee’를 통해 온라인 정체성과 공동 저작, 디지털 생태계가 지속되는 방식을 탐구한다.

이처럼 참여 작가들의 작업은 하나의 서사로 수렴되지 않는다. 사물의 기능을 변형하고, 이동과 소통의 경로를 바꾸며, 기억과 현실, 원본과 복제의 경계를 오간다. 신체와 디지털 공간에 부여된 기존의 질서 역시 각자의 방식으로 다시 바라본다.
LOOPHOLE 포스터
LOOPHOLE 포스터

전시가 주목하는 지점은 이러한 서로 다른 작업들이 각자가 처한 조건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다른 가능성을 만들어내는가에 있다. 동시에 서로 다른 장소에서 출발한 작업들이 한 공간에서 만나면서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는 과정도 함께 살펴본다.

《LOOPHOLE》은 독립 큐레이터 최태호(Taeho Choi)와 라트비아 큐레이터 자네테 리에키테(Žanete Liekīte)가 공동 기획했다. 두 큐레이터는 한국과 발트 지역 작가들의 작업을 연결하고, 서로 다른 지역에서 출발한 작업이 새로운 장소에서 만나는 과정을 전시로 구성했다.

자네테 리에키테는 2025년 창동레지던시 해외 연구자 입주 프로그램 참여를 계기로 한국에서의 활동과 교류를 이어왔으며, 이번 전시는 이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한국과 발트 지역의 작가들이 만나는 자리로 마련되었다. 최태호는 참여 작가들과의 협업과 전시 관련 협력을 담당했다.

이 과정에서 ‘틈(Loophole)’은 채워져야 하는 빈 공간이 아니라, 기존의 체계가 작동하지 않는 순간 새로운 가능성이 발생할 수 있는 공간으로 해석된다. 경계와 규칙 사이에 생겨난 틈에서 무엇이 새롭게 만들어질 수 있는가. 《LOOPHOLE》은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서로 다른 환경을 통과한 작업들이 만들어내는 작은 우회로와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한편 《LOOPHOLE》은 라트비아 국가문화자본재단(The State Culture Capital Foundation of Latvia)의 후원으로 진행된다. 전시는 오는 9월 19일까지 창동 레지던시에서 열린다.

최성민 더파워 기자 Sungmin@thepower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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