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미학의 전통에서 예술의 가치는 문화적 특수성을 얼마나 충실하게 재현했는가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작품이 기존의 인식 체계를 어디까지 변경시키는가이다. 새로운 예술은 새로운 이미지를 하나 더 보태는 데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을 다른 방식으로 보게 만든다.
이 기준에서 금보성의 한글회화를 바라본다면 질문은 명확해진다.
그의 작품은 한글을 세계미술사 안으로 가져가는가, 아니면 한글을 통해 세계미술사의 기존 문법 자체를 확장하는가.
두 질문은 전혀 다르다.
전자는 문화적 진입의 문제이지만 후자는 미학적 사건의 문제다.
금보성의 작업이 미술사적 의미를 획득하려면 한글이 한국을 대표하는 상징이라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한글이라는 문자체계로부터 이전의 회화가 갖지 못했던 조형적 원리와 시각적 사고가 발생해야 한다.
따라서 금보성에게 필요한 것은 한글의 세계화가 아니다.
한글로부터 발생하는 미술의 새로운 문법이다.
-한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작동하는가
금보성의 작품을 문화적 상징의 차원에서만 읽으면 쉽게 설명할 수 있다. 한글, 세종, 훈민정음, 한국의 역사와 정체성이라는 서사가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이 강해질수록 회화 자체는 오히려 약해질 위험이 있다.
독일 형식미학의 엄격한 관점에서 작품은 우선 화면 내부의 질서로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
ㄱ이 한국의 문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관객에게도 선의 방향과 단절은 작동하는가.
자음을 을 읽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폐쇄와 개방의 긴장은 전달되는가.
자음의 음가를 알지 못해도 원형과 공간의 관계는 성립하는가.
이 질문에 작품 스스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금보성이 한글을 사용하는 것과 한글의 구조가 금보성의 회화를 발생시키는 것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전자는 소재의 선택이다.
후자는 방법론의 발명이다.
세계미술사가 주목하는 것은 대개 후자다.
-해체의 목적은 파괴가 아니라 새로운 질서의 발견이다
금보성은 자음을 해체한다.
그러나 독일 현대미술의 맥락에서 본다면 해체 자체는 새로운 전략이 아니다. 20세기 미술은 이미 형태와 언어, 신체와 건축, 이미지와 기호를 끊임없이 분해해왔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해체했느냐가 아니라 해체한 이후 무엇을 발견했느냐이다.
금보성에게서 자음의 해체가 의미를 갖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문자에서 분리된 획은 더 이상 음가를 전달하는 최소 단위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방향이 되고, 경계가 되며, 반복과 충돌을 만드는 조형적 힘으로 이동한다.
문법은 색채의 질서로 변하고, 음절의 결합은 화면의 구조로 치환된다.
여기서 한글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깊은 층위로 내려간다.
보이는 한글에서 작동하는 한글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금보성의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자음이 파괴되는 순간이 아니다.
문자가 자신의 언어적 기능을 잃은 뒤에도 다른 질서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읽을 수 없는 한글’은 실패가 아니라 지각의 전환일 수 있다
금보성의 작품 앞에서 한국 관객은 외국인보다 오히려 더 큰 혼란을 경험할 수 있다.
익숙한 문자라고 생각했는데 읽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불편함은 작품의 약점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오히려 그의 한글회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우리는 한글을 너무 잘 읽는다.
보는 순간 의미를 찾고, 단어를 만들고, 문장을 구성한다. 문자의 형태를 충분히 바라보기 전에 독해가 시작된다.
금보성은 바로 이 자동화된 읽기를 중단시킨다.
읽으려는 순간 획이 흩어지고, 그림으로 보려는 순간 다시 문자의 기억이 나타난다.
관객의 시선은 읽기와 보기 사이를 반복해서 이동한다.
따라서 그의 한글회화가 제안할 수 있는 핵심은 단순한 ‘읽을 수 없음’이 아니다.
읽기의 질서를 공간적 지각의 질서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문자는 더 이상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진행하지 않는다. 시선은 색면을 건너고, 획을 따라가다가 멈추고, 다시 이전의 위치로 돌아간다.
독해가 이동이 된다.
언어가 공간 경험으로 변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글회화는 단순한 문자추상과 다른 철학적 가능성을 갖는다.
사진제공=송림아트센터
-한글의 세계성은 아름다운 모양이 아니라 생성 원리에 있다
한글의 시각적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새로운 미술사적 문법을 만들기 어렵다.
아름다운 형태는 얼마든지 차용되고 복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한글이 가진 생성의 구조다.
한글은 제한된 기본 요소가 위치와 관계를 바꾸면서 수많은 음절을 만들어내는 체계다.
하나의 형태가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 의해 새로운 단위가 생성된다.
금보성의 한글회화가 발전시켜야 할 미학적 핵심도 여기에 있다.
획은 분리될 수 있다.
분리된 획은 이동할 수 있다.
이동한 획은 다른 색면과 충돌할 수 있다.
하나의 구조는 확대되고 축소되며 반복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처음의 문자는 사라지지만 생성 원리는 남는다.
그렇다면 한글회화는 특정한 모양의 반복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른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시각적 알고리즘이 된다.
이것이 성립한다면 한글은 더 이상 그림의 소재가 아니다.
회화를 생산하는 하나의 체계가 된다.
-균열은 금보성 회화에서 무엇인가
금보성의 크랙 작업은 이러한 관점에서 특별히 검증할 필요가 있다.
균열이 단순한 표면 효과라면 그것은 하나의 기법에 머문다. 그러나 균열이 한글의 구조와 결합하면서 작품의 존재론적 의미를 바꾼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문자는 인간이 만든 질서다.
정확한 획과 규칙을 요구하고, 동일한 체계를 반복함으로써 의미를 보존한다.
반대로 균열은 통제에서 벗어난다.
물질의 수축과 팽창, 건조와 시간의 흐름이 작가가 만든 표면을 다시 조직한다.
그렇다면 한 화면 안에 두 종류의 시간이 존재하게 된다.
문자는 문명의 시간이고, 균열은 물질의 시간이다.
인간은 질서를 만들지만 시간은 그 질서를 갈라놓는다.
그리고 그 틈 사이에서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선이 태어난다.
이러한 관계가 의식적으로 발전된다면 금보성의 크랙은 단순한 재료적 효과를 넘어설 수 있다.
한글이 인간의 의지라면 균열은 인간이 완전히 지배할 수 없는 세계의 개입이다.
질서와 우연, 문명과 자연, 완성과 붕괴가 하나의 표면에서 공존한다.
그때 크랙은 한글을 파괴하는 흔적이 아니라 문자 이후의 시간을 보여주는 미학적 장치가 된다.
-거대한 한글 앞에서 인간의 위치가 바뀐다
금보성의 대형 작품을 숫자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27미터라는 길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문자의 크기가 인간의 신체를 넘어서는 순간 발생하는 관계의 역전이다.
우리는 평생 문자를 내려다보며 살아왔다.
책에서도, 신문에서도, 스마트폰에서도 인간은 문자보다 크다. 우리는 글자를 통제하고 선택하며 읽는다.
그러나 문자가 건축적 규모로 확대되는 순간 이 관계가 무너진다. 인간이 문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신체가 문자 내부에 위치하게 된다.
획은 선이 아니라 경계가 되고, 색면은 화면이 아니라 장소가 되며, 여백은 비어 있는 부분이 아니라 관객이 자신의 신체를 인식하는 공간이 된다.
여기서 한글은 세 번째 변화를 경험한다.
읽는 문자에서 보는 문자로, 다시 들어가는 문자로.
이 변화가 충분히 발전한다면 금보성의 한글은 회화라는 장르를 넘어 건축적·신체적 경험으로 이동할 수 있다.
-세계화는 설명의 증가가 아니라 번역 불가능성의 보존이다
한국미술이 세계로 나갈 때 흔히 범하는 오류 가운데 하나는 작품을 지나치게 설명하는 것이다.
한글의 창제 원리, 한국의 역사, 세종의 정신, 한국인의 정체성을 모두 설명해야 외국 관객이 작품을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강한 예술은 설명 이전에도 작동한다.
독일 관객이 ㄱ을 읽지 못해도 된다.
미국 관객이 ㅁ의 음가를 몰라도 된다.
프랑스 관객이 한글의 조합 원리를 처음부터 이해할 필요도 없다.
먼저 작품의 질서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중에 자신이 경험했던 구조가 한글이라는 독특한 문자체계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을 발견해야 한다.
그때 문화적 특수성은 이해를 방해하는 장벽이 아니라 작품을 한 번 더 해석하게 만드는 깊이가 된다.
세계성이란 모든 문화가 동일하게 이해하는 상태가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가 각자의 입구를 통해 들어오면서도 작품의 기원이 사라지지 않는 상태다.
금보성의 한글이 세계미술에서 살아남으려면 바로 이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비엔날레는 작가를 기념하는 장소가 아니라 미학을 검증하는 실험실이어야 한다
금보성비엔날레가 진정한 의미를 가지려면 한 작가의 성취를 기념하는 전시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오히려 금보성이 구축하려는 한글미학을 가장 가혹하게 검증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한글의 흔적이 사라져도 한글회화인가.
색채는 한글의 구조와 필연적인 관계를 갖는가.
크랙은 개념인가, 기법인가.
작품의 거대함은 실제로 관객의 지각을 변화시키는가.
같은 방법이 반복될 때 그것은 문법이 되는가, 스타일의 자기복제가 되는가.
이러한 질문을 피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공개해야 한다.
왜냐하면 새로운 미술사의 문법은 작가가 선언한다고 성립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품과 비평, 실패와 수정, 다른 문화권의 해석과 반론이 축적되어야 한다.
비평은 작품을 공격하는 행위가 아니라 작품에서 우연적인 것을 제거하고 필연적인 것을 찾아내는 과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금보성에게 가장 높은 찬사는 “완성되었다”는 선언이 아니다.
아직 더 질문해야 할 것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나주는 세계의 주변이 아니라 질문의 발생지가 될 수 있는가
금보성비엔날레가 나주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 역시 단순한 지역적 배경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세계미술의 중심에 진입하기 위해 반드시 기존 중심지를 모방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서 전시했느냐가 아니라 어디에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느냐이다.
나주에서 만들어진 질문이 베를린에서 비판받고, 파리에서 다르게 해석되며, 뉴욕에서 전혀 다른 미술사적 맥락과 충돌하고, 그 결과가 다시 나주의 다음 작업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나주는 주변부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미학적 발생지가 된다.
작품만 세계로 이동해서는 부족하다.
질문도 이동해야 한다.
비평도 이동해야 한다.
반론도 다시 돌아와야 한다.
그 순환이 만들어질 때 금보성비엔날레는 한 작가의 전시를 넘어 하나의 미학이 생성되고 수정되는 현장이 될 수 있다.
-세계미술사에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한국적인 그림’이 아니다
세계미술사는 이미 수많은 지역적 이미지와 문화적 상징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한국미술이 세계미술사에 새로운 기여를 한다는 것은 한국적인 이미지를 하나 더 제공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더 어려운 과제가 필요하다.
미술을 생각하는 방법 하나를 추가해야 한다.
서구 추상미술이 점·선·면·색을 독립적인 조형요소로 탐구했다면 한글은 다른 출발점을 제공할 가능성이 있다.
한글의 획은 처음부터 순수한 선이 아니다.
소리와 의미를 발생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구조의 일부다.
따라서 그것을 회화로 전환한다는 것은 단순히 문자를 추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적 관계를 조형적 관계로 변환하는 일이다.
이 차이가 중요하다.
금보성이 증명해야 할 것은 “한글도 추상미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보다 더 나아가야 한다.
한글이라는 체계가 기존 추상미술에는 없었던 생성 방식과 공간 질서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한글회화는 한국적 변형이 아니라 새로운 방법론의 제안이 된다.
-미술사에 진입하는 것이 아니라 미술사를 넓히는 것
세계미술사에 ‘한글’이라는 새로운 문법을 세울 수 있는가.
현재로서는 누구도 확정적으로 답할 수 없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질문은 유효하다.
미술사는 작가의 의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작품이 축적되고, 비평이 그것을 검증하며, 다른 문화가 해석하고, 다음 세대가 다시 변형하면서 형성된다.
결국 가장 엄격한 기준은 하나다.
금보성의 작품 이전과 이후에 우리는 문자를 같은 방식으로 바라보는가.
만약 그의 작품을 본 이후 문자를 단순히 읽히는 기호로만 생각할 수 없게 된다면,
만약 한글의 획에서 선을 보고, 선에서 공간을 발견하며, 공간에서 다시 언어의 기억을 경험하게 된다면,
작은 변화지만 미술사적 사건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금보성에게 필요한 것은 한글을 세계미술사라는 거대한 건물 안에 들여놓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건물에 지금까지 없었던 하나의 방을 만드는 일이다.
그 방에 들어가기 위해 한국어를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 방의 구조는 한글이 아니었다면 만들어질 수 없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가장 어려운 조건이다.
그리고 그것이 성립하는 순간 질문도 달라진다.
“한글이 세계미술사에 들어갈 수 있는가”가 아니라
“한글 이후 세계미술사는 이전과 같은 문법만으로 충분한가.”
금보성비엔날레가 감당해야 할 과제는 여기에 있다.
한글을 세계에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한글로 세계의 시각적 사고에 균열을 만드는 것.
한국미술의 자리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미술사의 경계를 한 칸 더 밀어내는 것.
그리고 마침내 한글을 한국의 문화적 상징에서 현대미술을 생성하는 하나의 사유 체계로 전환하는 것.
그때 세계미술사에 추가되는 것은 ‘금보성’이라는 한 작가의 이름만이 아닐 것이다.
한글이라는 문자로부터 미술을 다시 생각할 수 있다는 하나의 새로운 가능성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