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작가 박범신은 여전히 섹시하다. 68세의 중후한 그의 시선은 소설 속에서 농익은 문장과 이야기에 담겨 많은 이들에게 색다른 자극을 준다. 그런 그가 새로운 책 ‘소소한 풍경’을 세상에 선보인다. 책은 ‘갈망 3부작’ ‘자본주의 폭력성을 비판한 3부작’ 이후 논산집 호숫가를 쓸쓸히 배회하며 완성한 장편소설이다.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담고 있는 ‘소소한 풍경’은 저자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주인공이자 소설가인 ‘나’의 예민한 상상력을 통해 제자 ‘ㄱ’과 그녀가 겪는 불가사의한 이야기를 전한다.
집주인에게 억울하게 내쫓긴 세입자 ‘ㄴ’을 발견한 ‘ㄱ’은 ‘ㄴ’을 자신의 집에 머무르게 한다. 그들은 ‘ㄴ’의 집에서 덩어리 형태의 사랑을 나누었다. ‘ㄴ’은 말한다. “육체는 때로 영혼의 야영지(野營地)가 된다. 아니, ㄴ을 만나기 전까지의 육체는 내 영혼의 감옥이었을지도 모른다. 나의 육체가 감옥으로부터 야영지로 변이되는 것은 경이로운 경험이다. 몸뚱어리 속에 가시가 내장돼 있었던 게 아니라, 선과 악으로부터 놓여난 강물도 남몰래 흐르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그를 통해 자각한다.”
함께 하며 서로에게 만족감을 얻은 그들은 집 뒤란에 ‘ㄴ’의 우물을 파기 시작했고 우물이 완성될 즈음 ‘ㄷ’이 그들 앞에 찾아온다. ‘ㄴ’은 그녀를 집에 들이면 안 될 것을 예감하지만 ‘ㄱ’은 ‘ㄴ’의 뜻을 거부하고 ‘ㄷ’을 들인다. ‘ㄴ’의 우물 파기가 완성된 날 세 사람은 우물에서 나오는 첫 물을 마시며 밤을 보내고 다음 날, ‘ㄱ’은 우물 앞에 앉은 ‘ㄴ’을 발견하지만 어느 순간 ‘ㄴ’이 사라진 자리에 ‘ㄷ’이 남아 있다.
‘소소한 풍경’은 소설 ‘은교’에서 시인 이적요가 꿈꾸었지만 실행하지 못했던, 새로운 사랑을 꿈꾸는 이야기다. 이 때문에 ‘소소한 풍경’은 ‘은교’에서 못다 한 작가 박범신의 새로운 사랑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죽음에 관한 이야기, 존재의 시원함에 관한 이야기, 사랑의 불가사의하고 신비하고 위대한 근본적 꿈에 관한 이야기 등 다양한 모습으로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에서 인간 본질의 최저층에 대한 저자만의 특별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 소소한 풍경
박범신 저 |자음과모음 펴냄| 358쪽|13,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