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학생들의 가장 신나는 오락거리였던 시대가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함께 만화방에 몰려가 라면을 먹으며 만화보는 것에 열중하는 시대. 바로 그 중심에는 코믹스 만화가 있었다. 그렇다면 현대의 '만화'는 어떨까? 사실 지금의 만화 시장은 웹툰이 잠식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느덧 만화방은 추억의 장소가 됐고, 남아있는 만화방에서도 한국 작가들의 신간은 찾기 힘들어졌다.
이대로라면 코믹스 만화는 과거 대본계 만화처럼 10여 년의 호황을 뒤로 한 채 서점계 만화와 온라인 만화에 주류 시장의 패권을 넘기고 만화사의 저편으로 물러나야 할 상황이다.
전복적인 체제변화를 통해 코믹스계 만화의 전통을 잇기 위해서는 코믹스 만화의 역사와 현재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다. 과연 코믹스 만화가 웹툰이 지배하고 있는 현 만화시장에서 새로운 흐름을 일궈낼 수 있을지 탄생 시점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국내 만화계는 크게 네 가지 형태의 만화책 출판 형식과 소비 시장으로 진화해 왔다.
첫째, 전통적인 독과점 생산과 유통 방식을 취했던 '대본 만화'
둘째, 일본식 만화 전문 잡지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대본 만화의 장벽을 뛰어넘었던 '코믹스 만화'
셋째, 뚜렷한 시장을 형성하며 위축된 만화 시장을 견인하고 있는 '서점 만화'
넷째,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온라인 만화'
네 가지 형태의 만화책 소비시장을 문화마케팅 패러다임의 변화 과정을 빌려 자세히 알아본다.
■ 대본 만화
공장만화의 시초라고 불리는 김성모 작가의 '짱'
대본 만화는 1960년대부터 최근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여전히 유통라인 독점을 통한 대량생산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이 전략은 19세기 산업화 시대의 생산지향성 마케팅전략으로 풀이할 수 있다.
한때 전국적으로 2만여 개에 육박했던 만화방은 책만 있으면 될 정도로 탄탄한 소비시장이었다. 이때 우리 만화의 문제점으로 지적하는 '공장 만화', '다작 작가', '시리즈 만화' 등이 만화방 시장을 통해 등장했다.
공장만화는 말그대로 그저 만화를 찍어내기 위해 최소한의 기법으로만 작품을 만든다. 각 만화 공정단계별로 사람을 배치해 단기간에 많은 작품들을 출판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스토리의 개연성이 부족하고, 그림체가 무너지거나 배경이 어설픈 등 작품성이 낮았다. 물론 이런 대본 만화들 모두가 작품성이 떨어진다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대본 만화 출판 방식은 만화의 질적 저하를 가져왔다.
대본 만화는 1960년대의 1차 호황, 1980년대의 2차 호황을 거치며 대중화되었다. 이후 1990년대부터는 성인 남성 취향의 무협만화와 성인만화로 특화된 시장만 남게 됐다. 이 시기에 활동했던 작가로는 <신의 아들>의 박봉성, 국내 1세대 무협작가로 유명한 사마달, 하승남 등이 있다.
■ 코믹스 만화
좌= 양재현의 '열혈강호' 우= 박성우의 '팔용신전설'
1990년대 초에는 코믹스 만화가 급부상한다. 코믹스 만화는 타성에 젖어있던 기존 만화계를 비판적으로 수용했다. 기존 만화계 외부에 생산라인을 구축하고 다품종 대량생산이 아닌 양질의 제품 생산에 집중했다. <드래본골>, <슬램덩크> 로 대표되는 일본 만화를 직수입되면서 선풍적 인기를 끈다. 만화애호가들을 중심으로 활성화됐던 아마추어 만화계에서 보석같은 작가들이 배출되기 시작했다. <열혈강호>의 양재현, <팔용신전설>의 박성우 등이 대표적이다. 만화 잡지 공모전을 통해서는 <라그나로크>의 이명진 등이 등용됐다.
이전까지 몇몇 작가들에 의해 독점됐던 만화창작이 코믹스 만화를 계기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코믹스 만화는 시장 진입기부터 '독자의 재미'를 중심에 놓는 급진적 마케팅으로 만화계에 신선한 충격과 활력을 불어넣었다.
좌측부터 임재원의'짱', 김수용의 '힙합', 문정후의 '용비불패'
코믹스 만화는 호황이 이어졌지만 곧이어 시장 장악기에 접어들면서 비판적인 여론도 높아졌다.
일본 만화의 독점 유통 체제를 모방하고 '대본 만화 제작 형식의 코믹스판 전작 단행본'을 발행하는 등 대본 만화의 생산지향성 마케팅을 답습한다. 코믹스 만화의 암흑기에도 <짱>의 임재원, <힙합>의 김수용, <용비불패>의 문정후 등 걸출한 작가들이 나와 시장을 이끌기는 했다. 그럼에도 '독자의 재미'라는 소비자지향적 경영 철학이 무너진 코믹스 시장은 곧 외면받는다. IMF 등 경기 침체기가 겹치면서 업체들은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정책을 선회한다. 다품종 소량생산이 나쁜 전략은 아니지만, 이는 이야기 전개가 빈약한 다작을 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불황으로 재고는 넘쳤고, 업계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작품을 덤핑가 이하로 판매했다. 당연히 제대로 된 작가들이 나올 환경이 되지 못했다.
일본만화의 출판이 급증했던 2000년(62%) 이후 코믹스 만화 시장은 급격하게 위축됐다. 불황의 늪에 빠졌다. 코믹스 만화 시장이 침체되면서 뒤를 이어 서점 만화가 코믹스 만화를 대체하는 시장으로 전환하게 된다.
■ 서점 만화
좌측부터 '먼나라 이웃나라', '만화로 읽는 그리스로마신화', '마법천자문'
<먼나라 이웃나라>, <만화로 읽는 그리스로마신화>, <마법천자문> 을 모르는 세대는 없을 것이다. '학습교양 만화'로 1970년대 교양 잡지 전성시대에 나타난 '교양주의 만화' 열풍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곧이어 코믹스 만화에서 출발한 다양한 유형의 장르 만화도 서점 무대로 재등장한다. 서점 만화는 기존 코믹스 만화의 제본 형식을 벗어나 세련된 표지와 고급 용지, 부속물(작품 평론, 작가 인터뷰, 일러스트 엽서 등)을 포함하기 시작했다.
만화에 대한 시각도 달라졌다. 공부 못하던 애들이 보던 것이 만화였다. 서점 만화 시대에는 만화가 쉽고 재밌게 지식을 쌓을 수 있는 읽을거리로 인식됐다. 교양 잡지가 주도한 만화책 인식의 변화는 언론과 적극적인 광고 활동이 가능케 했다. 판매지향적인 마케팅을 구사할 수 있는 환경이 된 것이다.
간행을 중지하거나 폐지하고 있던 출판물을 다시 간행하는 '복간 만화'의 열풍을 바다그림판, 길찾기, 애니북스가 주도했다. 복간 열풍은 기존 소비 시장인 만화방과 책 대여점에서 멀어진 소비자를 서점과 통신 판매를 중심으로 끌어모았다. 서점 만화의 성공은 코믹스 만화 출판사에서도 영향을 미쳤다. 코믹스 만화 시절 인기있던 작품들이 '애장판'이라는 이름으로 재판됐다.
■ 온라인 만화
좌= 심승현의'파파포포 메모리즈' 우= 정철연의 '마린블루스'
온라인 만화는 출판만화를 온라인으로 전환하는 형식의 '온라인 만화'와 현재 만화 시장을 주도하는 '웹툰'으로 나눌 수 있다. 이중 출판 불황의 장기화를 뚫고 놀라운 판매 부수를 기록한 <파페포포 메모리즈>와 <마린블루스> 등의 1세대 웹툰은 '새로운 창작 형식 → 유통 구조 →소비 방식' 등을 고안해냈다.
예비독자와 작가가 책의 제작은 물론 유통에 깊숙이 참여하고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된 홈페이지를 이용해서 고객접촉 마케팅을 펼치는 것이다. 작가가 작품 기획, 제작, 유통, 판매, 고객관리까지 만화 출판사가 했던 모든 일을 직접 담당한다. 온라인은 자본이 많이 들어가는 인쇄와 고객유치를 위한 마케팅 비용을 '0'에 가깝게 해줬다. 출판사 중심의 만화시장은 곧바로 작가와 고객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된다.
온라인 만화는 온라인을 통해 유통되는 만화를 일컫는다. 사실 온라인 만화와 웹툰의 구분은 모호하다. 일반적으로 웹툰은 제작 처음부터 웹과 모바일 환경에 맞게 만들고 유통한 작품을 말한다. 온라인 만화는 웹툰을 포함해 e북 형식(기존 출판된 만화를 스캔한 형태로 제공)의 만화까지 포함해 구분하기도 한다.
현재 국내 온라인 만화는 웹툰 분야를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다. 코믹스 만화를 이끌었던 대다수의 만화가도 웹툰 분야로 활동영역을 넓히고 있다. 소비자 미디어 소비환경이 모바일 환경으로 급격하게 바뀌면서 만화시장도 웹툰 중심으로 재편됐다.
다음 기사에서는 코믹스 만화의 탄생과 위기, 한국 코믹스 만화 시장이 가지는 문제점과 세계로 나가기 위한 코믹스 만화계에 부여된 과제를 살펴본다. (2편 계속)
◎ 참고자료
- 『코믹스 만화의 세계』.저자 박석환 - 『세계 만화 미학론』. 저자 권경민 -『만화학 개론』. 저자 권경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