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학생들의 가장 신나는 오락거리였던 시대가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함께 만화방에 몰려가 라면을 먹으며 만화 보는 것에 열중하는 시대. 바로 그 중심에는 코믹스 만화가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만화'는 어떨까?
2017년 만화 시장은 웹툰이 잠식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빼곡히 벽면을 가득 채운 만화책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와 라면 냄새가 어우러진 만화방은 추억의 장소가 됐다. 예전 모습을 간직한 몇 안되는 만화방에서도 한국 작가의 신간은 찾기 힘들어졌다. 이대로라면 코믹스 만화는 서점 만화와 온라인 만화에 주류 시장의 패권을 넘기고 만화사 저편으로 물러나야 할 상황이다. 과연 코믹스 만화가 웹툰이 지배하고 있는 현 만화시장에서 새로운 흐름을 일궈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웹툰 '미생' (이미지=미생 만화책, 위즈덤하우스/미생 드라마,tvN)
국내 코믹스계 만화의 태생적 문제점은 일본 만화에서 찾을 수 있다. 국내 코믹스 만화 시장은 일본 만화가 역사상 최대의 호황기가 맞으면서 갑작스럽게 조성됐다. 갑작스럽게 성장한 국내 코믹스 시장이기에 산업적 기반은 매우 취약했다. 이는 한국형 코믹스 만화의 건강성을 유지하고 새로운 발전을 위해서 꼭 풀어야 할 숙제이다. 코믹스 만화의 문제점 세 가지를 짚어보고 발전 방향을 모색해본다. ■ 코믹스 만화의 문제점
1. 일본 만화 의존
만화 '드래곤볼'
당시 만화계는 일본 만화의 걸작들을 헐값에 사들여 막대한 이익을 남겼다. 1990년대 이후 형성된 코믹스 잡지 만화 시장은 '아이큐점프'와 '소년챔프'에 연재된 <드래곤볼>과 <슬램덩크>에 의해 형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도 만화출판계에서는 "일본 만화 팔아서 한국 만화 만든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일본 만화 한 권의 라이센스 구매 비용은 국내 창작 만화 한 권을 만들어 내는 비용과 비교해 볼 때 약 10배 이상 적다. 당연히 국내 출판사 입장에서는 우리 만화를 기획하기보다는 일본에서 인기가 검증된 작품을 번역·출판하는 것에 더 집중할 수밖에 없다. IMF 지원체제 이후 책 대여점 중심의 '만화를 빌려 보는 시장' 구조로 전환했다. 이에 좋은 작품의 생산보다는 다량의 작품 생산으로 초점이 이동했다.
이런 경향은 최근까지도 이어져 국내 만화 잡지는 '누가 좋은 일본 만화를 연재하느냐'에 따라 판매량이 좌우된다. 일본 만화 연재 고료에 대한 부담이 커지게 되면 상대적으로 국내 연재 만화에 대한 고료 비중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관례적으로 국내 만화 잡지는 국외 만화 수록의 비중을 30% 내외로 조정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 만화의 연재 지면을 유지하면서 고료를 낮추기 위해서는 고료가 낮은 작가들의 작품을 수록할 수밖에 없다.
2. 중견 만화가들의 이탈
경쟁력 있는 중견 작가들은 지면을 잃고 젊은 작가들은 경쟁력 높은 일본 만화에 맞서야 하는 것이 한국 만화계의 현 상황이다. 그나마도 판매 호전세가 보이지 않으면 곧바로 잡지 폐간을 결정하기도 한다. 현재 남아있는 만화 잡지는 이슈, 파티, 코믹진 점프 등이 있다. 과거 코믹스 잡지 만화가 수없이 쏟아져 나왔던 것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숫자다. 그마저도 대부분 온라인으로 발간되고 있어 서점에서 만화 잡지는 더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윤태호 '발칙한 인생'
윤태호의 <발칙한 인생>은 잡지의 폐간으로 두 번씩이나 연재를 접었다. 물론 출판자본의 상업적 판단도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출판사의 무리한 기획에 대한 책임이 만화가에게 전가되는 부분은 재고돼야 한다.
서점계 만화의 전성기는 교양 학습 만화가 이끌고 있다. 하지만 이 출발점에는 중견 작가 그룹이 있었다. 서점 만화를 이끌고 있는 작가들 역시 코믹스 만화 출판사로부터 외면받은 경우가 많다. 기껏 투자해서 성장시킨 인재를 놓친 것이다.
최근 중견 만화가들이 웹툰 시장에 등장했다. 지난 1월 웹툰 플랫폼 '코미카'에서 코믹스 만화를 웹툰 감성으로 재해석하는 '불후의 만화 명작'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지금의 1020세대와 같은 웹툰의 주 독자층을 이끌기 위한 전략이 아니다. 이탈했던 독자층(과거 코믹스 만화를 즐겨봤던 독자층)에 대한 편집부의 향수가 작용한 부분이 크다.
3. 출판 만화 산업의 투자 안전성
코믹스 만화의 마지막 쟁점 중 하나는 청소년보호법이다. 1997년에 제정된 이 법은 청소년의 건강한 정서 함양에 유해한 각종 매체물의 유통 규제와 심의, 벌칙 등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청소년보호법의 제정은 만화 시장에 크나큰 재앙으로 해석됐다. 공권력의 과도한 표현의 자유 침해, 매체 간 불평등한 규제 조항, 성인의 볼 권리 침해 등의 문제를 만들었다. 이 법의 시행과 IMF 등이 겹치면서 이제 막 산업화로 진입하려던 만화계의 발전은 차단됐다. 당시 서점은 모든 만화의 유통을 중단했고 만화방과 책 대여점은 수시로 단속의 대상이 됐다. 성인 만화 잡지는 모두 폐간됐고 청소년 만화의 표현 수위도 하향 조정됐다. 정부는 창작의 자유는 인정하되 매체물의 자율적 유통에 따른 법적 책임을 강화했다. 하지만 명확한 법적 기준점을 찾지 못하던 출판업계는 기발한 창작물에 투자하기 꺼려하게 된다.
해방 후 한국 만화는 10년을 주기로 호황과 불황을 반복하며 교양주의와 향락주의를 오갔다. 호황은 시장의 성숙과 다양성을 이끌고 오락적 가치의 추구는 다시 규제와 불황을 낳았다. 규제는 불황으로 이어지고 교양주의를 출현시켰으며 또 다른 호황을 만들었다. 80년대 대본 만화의 호황은 만화계 내부의 도덕적 해이와 해적판 일본성인 만화의 출현, 교양주의적 입장의 잡지 만화 출연 등으로 일단락됐다. 90년대 코믹스 만화의 호황에서도 폭력과 선정성의 문제, 청소년보호법 실행 등이 문제가 됐다. 코믹스 만화의 오락성에 대한 비판은 곧 서점 교양학습 만화의 호황으로 이어졌다. 최근 상황을 대본 만화와 코믹스 만화의 불황, 서점 만화와 온라인 만화의 호황으로 정리한다면 이 구조는 곧 뒤바뀌게 될 것이다. 물론 이같은 패턴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만화계가 호·불황의 변화 주기별로 특별한 창작 흐름을 만들어왔던 점이다.
만화계의 새로운 역사를 위해 지금의 코믹스 만화가 발전시켜야 할 부분은 무엇일까?
■ 코믹스 만화의 발전 방향
우리 코믹스 만화는 일본 만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코믹스 만화라는 전통부터 일본의 양식을 빌려 왔기 때문이다. 일본 만화 작품들의 등장은 당대 우리 만화계에 새로운 흐름을 가져왔다. 이제부터의 과제는 한국형 코믹스 만화를 구성하는 것이다. 더불어 세계 문화 콘텐츠 시장에 '한국 만화'의 정체성을 심어야 한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문화 트렌드를 읽는 새로운 시선과 내용이 중요하다. 대부분의 만화 창작 형식과 방법론은 일본 만화를 닮아있다. 그러나 그 시선과 내용을 변화시킨다면 형식에 대한 고민도 새로워질 수 있다. 예로 아이들 간의 주먹싸움이 소년 독자의 욕망을 대리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 김수용의 <힙합>은 그 길을 따르지 않았다. 우정과 노력이 있었으며, 승리가 그려졌지만 주먹싸움 대신 쇼다운(춤 대결)이라는 행위 등 새로운 시선을 보여줬다. 전극진·양재현의 <열혈강호>는 최고 판매 부수를 기록한 인기 만화다. 영웅 서사물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이 작품은 이미지 과잉, 형식 과잉으로 내달리고 있는 우리 만화에 서사의 중요성을 재인식시켜줬다.
웹툰 IP를 활용한 드라마 '치즈인더트랩'
현재 만화 IP를 활용한 영화, TV드라마, 애니메이션, 온라인게임, 웹소설 등이 제작되고 있다. 또 일본 만화의 홍수 속에 살고 있지만 다른 나라에 비해 풍부한 자국 만화의 지형을 구축하고 있다. 형식은 일본 만화를 닮아있다고 해도 내용의 새로움을 담보할 수 있는 환경을 지닌 것이다.
네이버, 카카오 등 자본력을 갖춘 콘텐츠 사업자도 국내 작가들의 작품에 적극 투자하고 있다. 또 국내 웹툰 플랫폼들이 해외 시장으로 뛰어들어 우리 만화를 세계에 알리고 있다. 만화 콘텐츠뿐만 아니라 웹툰 IP를 활용한 드라마 등을 통해 일본 만화와는 다른 방법과 전략으로 세계로 향하고 있다. 국내 만화 시장의 진정한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지고 있다. 출판 만화로만 만화 산업을 국한해서 생각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만화는 발전 가능성과 새로운 기회가 열려있는 분야다.
코믹스 만화가 10년간 쌓아올린 만화책 한 권 한 권은 문화 콘텐츠 산업의 밑거름임은 분명하다. 만화 업계는 만화콘텐츠 유통의 변화를 직면하고, 좋은 만화 콘텐츠 창작에 집중할 때이다. 좋은 콘텐츠만 있다면 얼마든지 모바일, 웹, 출판 서적 등 다양한 경로로 확장될 '실크로드'가 열렸기 때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