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심리학자인 로저 생크는 이야기가 인류의 지식 축적에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고 한다. 인간의 뇌는 본인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사실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 형태로 저장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뇌에는 episodic-memory region이라 불리는 이야기를 저장하는 영역이 별도로 존재하는데 여기서 저장할 수 있는 정보는 다른 기억 용량에 비해 훨씬 방대하고 오랜 기간 기억된다.
스토리가 다양하게 활약하고 있는 우리 주변을 한번 살펴보자. 먼저 최근 그 성장 속도가 무섭게 치고 올라가고 있는 캐릭터 비즈니스가 있다. 캐릭터 비즈니스는 소비자의 다양한 구매 욕구와 감각적인 소비 형태에 부합하고 있어 기업들의 주요한 마케팅 수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데 성공한 캐릭터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을 찾아보면 바로 스토리를 정교하게 디자인하여 캐릭터를 입체감 있게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중 매체의 콘텐츠 자극 강도가 높아지는 환경 속에서 해당 캐릭터에 독자적인 이야기를 입혀 소비자들의 눈과 귀를 끌고 있는데, 마치 실존하는 듯한 캐릭터를 정교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카카오프렌즈의 대표적인 캐릭터인 라이언은 ‘아프리카 둥둥섬의 왕위 계승자였으나 자유로운 삶을 원해 집에서 도망쳐 나온 갈기와 꼬리가 없는 수사자’라는 조선의 양녕대군을 연상시키는 출생 스토리를 갖고 탄생했다. 이후 카카오프렌즈의 기록적인 매출 상승에 기여하고 국내 캐릭터 선호도 평가 1위에 오르면서 ‘라 상무’에서 ‘라 전무’로 특별 승진하였다는 오피스 스토리가 추가로 만들어진다. 이대로 가면 조만간 부사장 승진도 가능할 것 같다. 이처럼 그저 하나의 탄생 스토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관리하며 새로운 이야기를 끊임없이 재생산함으로써 대중의 관심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이다.
교육방송 EBS 〈자이언트 펭 TV〉의 주인공인 펭수는 본래 최고의 크리에이터를 꿈꾸는 EBS 연습생이라는 스토리를 가지고 태어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제작된 캐릭터였다. 하지만 오히려 직장생활에 지친 20~30대 사회초년생들이 펭수가 던지는 돌직구 발언에 대리만족을 느끼면서 성인들 사이에서 라이징스타로 등극한다. 스타트업에서 유행하는 빠른 스토리 피보팅(pivoting)을 진행하여 자리 잡았다.
반면 기억에서 가물가물해진 캐릭터도 있다. 잠실 석촌호수 근방에서 오랜 기간 서식하고 있는 너구리 ‘로띠’나 용인 지역 넓은 땅을 배회하는 새끼 사자 ‘레니’와 ‘라라’의 스토리에 대해서 들어보셨는가? 각인되는 스토리가 없으니 캐릭터 또한 존재감이 미미해졌다.
2021년 세계적인 흥행 돌풍을 일으킨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456억 원의 상금이 걸린 의문의 서바이벌 게임에 참가한 사람들의 목숨을 건 도전 이야기를 그려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무엇이 이 드라마의 성공을 견인했을까 생각해보면 성공의 핵심에는 ‘목숨을 건 서바이벌 게임’이라는 잔인하고 섬찟하지만 낯설지 않은 스토리가 자리 잡고 있다. 게임이나 영화를 통해서 우리는 이미 그 문법에 친숙해 있었다.
쇼미더머니부터 미스터트롯까지, 수많은 경연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도 실력은 물론이거니와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후보들이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규칙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방송 분량도 실제 공연뿐 아니라 준비 과정이나 일상생활에 대한 영상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참가자들이 가지고 있는 스토리에 시청자를 몰입시키기 위한 장치다. 어릴 적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부모님과 떨어져 조부모 아래서 어렵게 살아왔다는 가수 지망생, 수십 번의 오디션 탈락에도 굽히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부단히 도전하는 연기자, 독설 가득한 평가를 퍼붓던 심사위원에서 잃어버린 초심을 찾겠다고 참가자로 내려온 힙합 가수, 그룹으로 같이 활동하던 시절 갈등으로 헤어졌다가 다시 콜라보 공연무대를 만들면서 극적 화해를 하게 되는 참가자, 이러한 스토리들은 대중의 공감을 불러일으켜 보다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 준다.
공부도 스토리가 활발히 활용되는 분야다. 소위 공부 잘하는 아이들의 암기 방법을 잘 들여다보면 저마다 작은 스토리를 만들어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가령 과학 시간에 나오는 대기권의 층상구조를 대류권, 성층권, 중간권, 열권으로 그냥 외우기보다 앞 글자만 따서 ‘대학 가서 성공하려면 중학교 때부터 열심히 해야 한다’라는 문장을 만들어 외우는 식이다. 조금은 유치하지만 그 기억은 분명 오래간다.
러시아의 수백 개 민담 구조를 분석한 블라디미르 프로프를 시작으로 각 나라의 신화에서 공통된 이야기 구조를 도출한 조지프 켐벨의 영웅 여행론, 구조주의 서사를 기호학에 응용한 그레마스 기호학, 또 최근 할리우드 영화의 바이블로 불리는 크리스토퍼 보글러의 이론서 등은 인간의 두뇌 회로에 저장하는 데 최적화된 이야기 구조를 찾기 위한 노력으로 완성되었다. 그리고 연재로 집필하고 있는 이 칼럼은 비즈니스 영역에서 통용되는 스토리 구조의 공식에 대해 이어가려 한다. 다음 호부터는 비즈니스 전략에서 빈번히 활용되는 8개의 플롯을 순서대로 소개하도록 하겠다.
정세현, 스토리 디자이너
탁월한 문제해결 능력으로 대한민국 오피니언리더들이 먼저 찾는 20년 경력의 경영 컨설턴트이다. 삼일PwC, IBM 등을 거쳐 현재 컨설팅 자문사 티볼리컴퍼니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연세대학교와 영국 노팅엄 트렌트 대학교(Nottingham Trent University)에서 경영학을 공부하였다. 삼성전자, 현대차, LG, SK 등 대기업에서 강연과 워크숍을 통해 임직원들의 전략적 사고 함양에 도움을 주고 있으며, 이 외에도 다양한 기업들에 자문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경영 우화 《사파리》, 사내정치를 다룬 《당신은 정치력이 있습니까》, 음모론 소설 《더 픽서》(전2권) 등을 집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