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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ETCI로 본 스케일업 금융…한국도 후속투자 과제 부각

이경호 기자

기사입력 : 2026-06-08 14:50

ETCI 2.0으로 민간 장기자금 유입 확대…한국도 후기 성장기업 금융공백 해소 과제

생성형 AI로 만든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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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파워 이경호 기자] 초기 창업기업에 대한 투자와 지원은 확대됐지만, 일정 단계 이상 성장한 기술기업이 대규모 후속 자금을 조달하는 과정에서는 여전히 자금 공백이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산업은행 미래전략연구소는 최근 발간한 KDB리포트에서 유럽의 ‘유럽 기술 챔피언 이니셔티브(ETCI)’를 분석하며 국내에서도 후기 성장단계 기업에 대한 장기 자본 공급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ETCI는 유럽 기술기업의 스케일업을 지원하기 위해 유럽투자은행(EIB) 그룹이 추진한 금융지원 프로그램이다. 유럽투자은행 그룹은 2023년 유럽 기술기업의 후기 성장자금 부족 문제를 완화하고 기술주권을 강화하기 위해 ETCI 1.0을 출범시켰다. 운영은 EIB 그룹 산하 유럽투자펀드(EIF)가 맡았다.

보고서에 따르면 유럽은 연간 약 700억유로 규모의 후기 벤처투자 자금 공백을 안고 있다. 미국에 비해 대형 펀드 수와 후기 투자시장 규모가 부족해 유럽 스타트업들이 시리즈B 이후 대규모 자금조달 단계에서 미국 자본시장으로 이전하거나 해외 기업에 인수되는 사례가 이어져 왔다.

ETCI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별 기업에 직접 투자하는 방식이 아니라, 공공재원을 벤처캐피털(VC)·사모펀드(PE) 등 성장단계 펀드에 출자하는 재간접펀드 구조로 설계됐다. 공공자금이 앵커 투자자 역할을 맡아 민간 출자자의 참여를 유도하고, 연기금과 보험사 등 장기자금이 벤처투자시장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다.

ETCI 1.0은 프랑스,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등 6개 유럽연합 회원국이 참여해 출범했다. 펀드당 투자 규모는 약 1억~3억5000만유로 수준으로, 인공지능(AI), 소프트웨어, 사이버보안 등 다양한 기술 분야의 성장기업을 지원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ETCI 1.0의 목표는 약 39억유로의 재원을 조성해 성장단계 VC·PE 펀드 약 15개에 투자하고, 이를 통해 200억유로 이상의 투자를 유도하는 것이었다. 지난해 4월 기준 ETCI는 34억유로를 펀드에 투자해 유럽 기업 43개를 지원했으며, 11개의 유니콘과 2만5000개 이상의 일자리 창출 성과를 냈다.

/한국산업은행 미래전략연구소
/한국산업은행 미래전략연구소

유럽은 ETCI 1.0의 성과를 바탕으로 2025년 ETCI 2.0을 출범시켰다. 2.0은 기존보다 출자 기반과 투자 규모를 확대한 것이 특징이다. ETCI 1.0이 EIB 그룹과 회원국 중심으로 운영됐다면, ETCI 2.0은 보험사, 연기금, 은행 등 민간 기관투자자까지 모펀드 출자자로 참여하는 구조다.

규모도 크게 커졌다. ETCI 2.0은 150억~200억유로의 앵커 자금을 바탕으로 총 800억유로 규모의 자금 조성을 목표로 한다. 지원 대상도 메가펀드 15개 수준에서 중형·메가펀드를 포함한 100개 펀드, 1500개 이상 기업으로 확대될 예정이다.

보고서는 ETCI 사례가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봤다. 국내에서도 창업 초기 단계 지원은 상당 부분 확대됐지만, 기업이 글로벌 시장으로 확장하거나 대규모 연구개발과 설비투자, 인력 확보를 추진하는 성장 후반부 단계에서는 장기자본 공급이 충분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술기업은 초기 아이디어와 제품 개발 이후에도 시장 확대, 해외 진출, 후속 연구개발 과정에서 큰 규모의 자금이 필요하다. 그러나 투자 회수 기간이 길고 위험이 큰 스케일업 투자 영역은 민간자금만으로 충분히 커지기 어렵다. 이 지점에서 정책금융이 앵커 투자자와 위험분담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보고서의 문제의식이다.

공공재원이 먼저 대형·장기 투자 영역에서 신뢰 기반을 만들면 민간 출자자의 후속 투자를 끌어낼 수 있다. 특히 연기금과 보험사 등 장기 운용자금이 벤처투자시장에 참여할 수 있는 금융환경을 조성하면, 장기적으로는 민간 중심의 자생적 투자 생태계 구축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스케일업 금융은 단순히 특정 기업에 자금을 지원하는 문제를 넘어 기술주권과 산업경쟁력 확보와도 연결된다. 유럽이 ETCI를 추진한 배경 역시 유망 기술기업이 성장 과정에서 역외로 이전하거나 해외 자본에 편입되는 흐름을 줄이기 위한 목적이 컸다. AI, 반도체, 사이버보안, 바이오 등 전략기술 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성장기업을 국내 생태계 안에서 키우는 자본 구조가 중요해지고 있는 셈이다.

한국도 첨단전략산업과 AI, 바이오, 로봇, 기후기술 등 미래 성장 분야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초기 창업 지원을 넘어 후기 성장단계 자금 공급체계를 정교하게 설계할 필요가 있다. 정책금융이 민간투자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 장기자금을 끌어들이는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유럽 ETCI는 참고할 만한 사례로 제시된다.

결국 핵심은 성장기업이 국내에서 충분히 커질 수 있는 자본시장을 만드는 것이다. 기술기업이 일정 단계 이상 성장한 뒤에도 국내에서 대규모 후속투자를 받고 글로벌 경쟁에 나설 수 있어야 산업 생태계의 지속성이 높아진다.

이경호 더파워 기자 lkh@thepower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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