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장사 주주환원 2년 새 56조→92조…자사주 소각액 처음으로 취득액 앞질러
삼성전자 잔여 환원재원 90~110조·SK하이닉스 40조 매입·소각…반도체 선봉
보험·반도체·증권 주주환원 여건 상위권…지주사는 자사주·관계사 배당 따라 차별화
[더파워 이경호 기자] 한국 증시에서 주주환원이 일회성 주가 부양책을 넘어 기업의 자본배분 정책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배당을 늘리거나 자사주를 사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소각을 통해 발행주식 수 자체를 줄이고, 향후 수년간 지켜야 할 환원 기준을 사전에 공개하는 기업도 빠르게 늘고 있다.
특히 지난해 국내 상장사의 자사주 소각 규모가 취득액을 처음 넘어섰다. 올해 들어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대규모 주주환원 계획을 내놓으면서 변화의 중심이 금융주와 저PBR주에서 반도체 대형주로 이동하는 모습이다.
/연합뉴스
26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국내 상장사의 자사주 취득 규모는 2023년 8조2000억원에서 2024년 18조8000억원, 지난해 20조1000억원으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소각 규모는 4조8000억원에서 13조9000억원, 21조4000억원으로 불어났다. 지난해 처음으로 소각액이 신규 취득액을 앞질렀다.
현금배당도 2023년 43조1000억원에서 지난해 50조9000억원으로 늘었다. 자사주와 배당을 합친 환원 규모는 2년 만에 약 56조원에서 92조원으로 확대됐다.
실제 발행주식 수가 줄어드는 기업도 많아졌다. 코스피200 구성사 가운데 발행주식 수가 감소한 기업은 2017년 4곳에 불과했지만 지난해 36곳까지 늘었다.
이 변화는 제도와 맞물려 있다. 이사의 주주에 대한 책임을 강화하는 상법 개정에 이어 올해 3월부터 자사주 소각 의무화가 시행됐고, 1월부터는 일정 요건을 충족한 기업의 배당에 분리과세가 적용되기 시작했다.
과거 국내 기업이 자사주를 취득해도 다시 처분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실제 주주가치 개선 효과에는 할인 요인이 붙었다. 소각이 제도화되면서 앞으로는 매입한 주식이 시장에 다시 나올 가능성이 낮아졌고, 이미 보유한 자사주 역시 순차적인 소각 대상이 됐다.
주가 반응에서도 변화는 확인된다. 국내 대형 주주환원 사례 23건을 분석한 결과 발표 다음날 시장 대비 초과수익률은 평균 3.98%포인트였으며, 78%가 플러스 수익률을 기록했다. 다만 다섯 건 가운데 한 건가량은 오히려 시장을 밑돌았다. 환원 규모만 크다고 주가가 일률적으로 오르는 구조는 아니라는 얘기다.
차이를 만든 것은 기업이 놓인 조건이었다. 주가순자산비율(PBR)이 0.5배 미만인 기업의 자사주 취득 발표 다음날 초과수익률은 평균 4.8%포인트로 PBR 2배 이상 기업의 2.3%포인트보다 두 배 이상 높았다.
시간이 지나도 차이는 유지됐다. 발표 후 120거래일까지 누적 초과수익률은 PBR 0.5배 미만 기업이 9.0%포인트, 2배 이상 기업은 4.5%포인트였다.
배당은 단기보다 장기 영향이 더 뚜렷했다. 국내 현금배당 공시 5655건을 분석한 결과 배당 증액 기업과 삭감 기업의 다음날 초과수익률 차이는 크지 않았지만 6개월 뒤에는 증액 기업이 1.1%포인트, 삭감 기업은 마이너스 7.6%포인트를 기록했다.
결국 시장이 평가하는 것은 단순한 환원 금액보다 지속 가능성에 가깝다. 이익이 늘고 현금이 쌓이는 기업이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환원을 반복할 때 밸류에이션 변화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올해 가장 큰 변화가 예상되는 곳은 반도체다.
삼성전자는 2024~2026년 3년간 잉여현금흐름(FCF)의 50%를 주주에게 돌려주고 연간 약 9조8000억원의 정규배당을 지급하는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올해 남은 주주환원 재원은 약 90조~110조원으로 예상됐다. 삼성전자는 3분기 정규배당을 포함해 약 30조원의 현금배당을 추진하고, 결산 이후 내년 1월 이사회에서 잔여 재원의 구체적인 환원방식을 확정할 예정이다. 현금배당과 자사주 매입·소각을 함께 사용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한발 더 나갔다. 지난 19일 40조원 규모의 자사주 매입을 결정했고 매입한 주식은 모두 소각할 예정이다. 대상은 2407만주로 발행주식의 약 3.3%다.
기존 2025~2027년 누적 FCF의 ‘50% 범위 내’였던 추가 환원 기준도 ‘50% 이상’으로 바뀌었다. 환원의 상한선을 제시했던 방식에서 최소 기준을 정하는 구조로 전환한 셈이다.
막대한 환원에도 반도체 투자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삼성전자는 올해 설비투자와 연구개발에 110조원 이상을 투입할 계획이다. SK하이닉스 역시 AI 메모리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생산능력 확대가 이어지고 있다.
주목할 대목은 ‘투자를 줄이고 남은 돈을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AI 메모리 호황으로 현금창출력이 커지면서 성장투자를 집행한 이후에도 주주에게 돌려줄 현금이 남는 구조가 나타나고 있다.
SK하이닉스 이천캠퍼스 / 사진=연합뉴스
금융투자업계가 메모리 기업의 환원 확대를 과거와 다르게 보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삼성전자와 마이크론은 과거에도 공격적인 자사주 매입과 배당을 시행한 경험이 있지만 메모리 사이클이 꺾일 때마다 현금흐름이 급감하면서 낮은 밸류에이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환원 의지보다 높은 이익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는지를 시장이 믿지 못했던 것이다.
AI 시대에는 이익 지속기간을 늘릴 수 있는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다.
AI 데이터센터는 단순한 비용시설에서 장기간 현금흐름을 만들어내는 자산으로 바뀌고 있다. GPU와 고객계약을 담보로 외부 자금을 조달하는 사례도 등장하면서 AI 투자 재원이 대형 빅테크의 자체 현금에만 의존하지 않는 구조로 넓어지고 있다.
엔비디아는 아폴로와 블랙록, 블랙스톤, 브룩필드, 골드만삭스, KKR 등과 AI 컴퓨트 금융 플랫폼 구축을 추진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 5000억달러 이상의 외부 자본을 끌어들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네비우스는 배치된 GPU 인프라와 투자등급 고객의 계약 현금흐름을 기반으로 약 7억7500만달러를 조달했고, 코어위브도 31억달러 규모의 고성능컴퓨팅(HPC) 인프라 금융을 성사시켰다.
AI 투자에서 자금조달 제약이 낮아질수록 병목은 전력과 GPU, 메모리, 네트워크 같은 실제 설비로 이동한다.
메모리에는 오히려 유리한 변화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설치한 GPU가 메모리 부족 때문에 제대로 가동되지 못하면 손실은 메모리 구매가격에 그치지 않는다. 데이터센터 가동률과 서비스 생산량, 고객계약 이행에도 영향을 미친다.
장기공급계약(LTA)도 과거 메모리 사이클과 다른 변수다. 최근 장기계약에는 일정 물량을 구매해야 하는 약정과 선수금·예치금 등이 결합되면서 공급업체가 증설하기 전에 고객 수요를 일정 부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과거에는 메모리 업체가 수요를 예상해 생산능력을 먼저 늘리고 나중에 수요가 따라오기를 기다렸다. 지금은 일부 AI 메모리에서 고객의 물량 약정이 먼저 나오고 이를 토대로 생산능력을 배분한 뒤 투자가 진행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에 따라 메모리업계의 평가 기준도 최고 영업이익률이 얼마까지 올라가느냐에서 높은 이익을 얼마나 오래 유지할 수 있느냐로 이동할 가능성이 있다.
최근 SK증권이 제시한 시나리오에서는 2027년 주요 메모리업체의 시가총액 대비 주주환원 규모가 약 10~25%에 이를 가능성이 제시됐다. AI 투자를 확대하면서 동시에 두 자릿수 수준의 주주환원까지 가능해질 경우 기존 고배당주와는 다른 성격의 투자대상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반도체만 수혜 대상은 아니다. 지주회사도 새로운 주주환원 환경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들어가고 있다.
지주회사는 자회사 배당과 상표권 수입이 주요 현금원이다. 자회사 이익이 늘고 배당이 확대되면 별도 실적이 좋아지고 다시 지주사 주주에게 환원할 수 있는 재원도 증가한다.
전체 상장사 가운데 기업가치 제고 계획을 공개한 기업 비중은 29%였지만 일반 지주회사는 46%로 집계됐다. 지주사가 시장 평균보다 먼저 배당과 자사주 정책을 구체화하고 있다는 의미다.
SK와 삼성물산, 한화, 현대지에프홀딩스 등은 최소 주당배당금(DPS)을 제시하고 있다. 삼성물산과 SK스퀘어는 관계사에서 받은 배당수입의 일부를 다시 주주에게 돌려주는 정책을 운영하고 있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대규모 환원이 지주회사 주주에게 다시 전달될 수 있는 구조다.
삼성물산은 2026~2028년 관계사 배당수입의 60~70%를 주주에게 환원할 계획이다. 삼성전자의 3분기 약 30조원 배당과 삼성생명의 특별배당이 없다는 가정을 적용하면 금융투자업계에서는 2026년 삼성물산 DPS가 8550원까지 높아질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SK스퀘어도 SK하이닉스 주주환원의 간접 수혜가 예상된다. SK하이닉스가 3.3%의 자사주를 소각하면 SK스퀘어의 지분율은 별도 매입 없이 20.0%에서 약 20.7%로 높아진다. 향후 특별배당까지 확대되면 지주사로 유입되는 현금도 증가할 수 있다.
다만 지주회사라는 이유만으로 일괄적인 수혜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보유 자사주 비중만 해도 SK 24.8%, 롯데지주 23.7%, 두산 16.0%로 높은 곳이 있는 반면 조사 대상 25개 지주사 가운데 14곳은 1%에도 미치지 못했다. 지주사 중앙값은 0.4%에 그쳤다. 자사주 소각 의무화 효과가 기업마다 크게 갈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주주환원 자체가 본업 부진을 덮어주는 것도 아니다. 해외에서는 IBM이 25년간 2010억달러를 자사주 매입에 투입했지만 매출 감소가 이어지면서 장기적으로 시장 수익률을 밑돌았다. 일본에서도 NTT와 JT, 캐논 등은 높은 배당과 자사주 매입에도 성장성 부족으로 장기간 정체를 겪었다.
국내에서도 업황이 부진한 상태에서 대규모 소각을 발표했던 기업들의 주가가 환원정책만으로 추세를 돌리지 못한 사례가 있다.
결국 다음 단계에서 시장이 구분할 것은 ‘환원하는 기업’과 ‘환원할 수밖에 없을 만큼 현금을 버는 기업’이다.
업종별로는 보험이 주주환원 관련 종합점수 80점으로 가장 높았고 반도체가 77점, 증권과 조선이 각각 74점으로 뒤를 이었다. 반도체는 FCF 수익률 19.3%와 이익 모멘텀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다만 이미 주가가 빠르게 오른 업종은 진입가격을 따로 살펴야 한다. 반도체와 은행, 증권의 PBR은 각각 2015년 이후 자체 역사에서 98.0%, 97.6%, 92.8% 백분위까지 올라온 것으로 분석됐다. 환원 여력이 크다는 것과 현재 주가가 싸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의미다.
한국 증시는 그동안 기업이 벌어들인 현금이 실제 주주의 몫으로 돌아올지에 대해 높은 할인율을 적용받아 왔다. 이제 자사주 소각과 배당 확대가 법과 세제, 기업의 중기 정책으로 동시에 움직이면서 그 할인 구조가 시험대에 올랐다.
올해와 내년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대규모 환원 집행, 주요 기업의 중기 환원정책 갱신, 기존 자사주의 소각 일정이 차례로 이어진다. 주주환원이 단발성 이벤트를 넘어 한국 증시의 새로운 평가 기준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를 확인하는 구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