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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05 (토)

문화

장벽의 시대, 변경의 종말

이설아 기자

기사입력 : 2025-06-20 09:56

[이병록의 책을 통해 세상 읽기] 그렉 그랜딘의 '신화의 종말'

장벽의 시대, 변경의 종말
미국은 누구보다 미래를 믿었던 나라였다. 그 믿음은 ‘변경(Frontier)’이라는 단어로 응축된다. 국경이 아니라, 사고방식이자 정신이었다. 미국은 처음부터 ‘닫힌 땅’이 아니라 ‘열린 변경’을 전제로 건국된 국가였다. 그래서 영토의 끝자락은 단순한 지리 개념이 아닌, 개인의 자유, 민주주의, 번영이라는 이상이 구현되는 공간이었다.

예일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그렉 그랜딘은 『신화의 종말』에서 미국의 ‘변경(Frontier)’ 신화가 끝났다고 선언한다. 그에게 있어 이 신화의 종말은 단순한 문화적 전환이 아니라, 미국 사회를 지탱해 온 핵심 가치의 붕괴다. 그는 묻는다. “확장이 더 이상 미래에 대한 약속도, 현실 해답도 되지 못할 때, 미국은 무엇으로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가?”

프레더릭 잭슨 터너는 1893년 시카고 박람회에서 발표한 논문에서 “변경은 미국 정신의 요체”라고 말했다. 그는 변경을 단순한 물리적 경계가 아닌, 문명과 야만이 만나는 가장자리, 실험실, 기회의 공간, 자유의 땅으로 정의했다. 미국은 이 변경을 통해 국가적 통합을 이뤘고, 개인의 자유를 신화로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 신화는 처음부터 배제와 폭력을 전제로 했다. “착한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이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변경은 원주민을 몰아내는 공간이었다. 자유란 남의 땅을 빼앗고, 노예제를 유지하며, 정부의 개입 없이 이익을 추구하는 백인의 특권이었다. ‘자유’는 타자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을 자유가 아니라, 구속에서 벗어날 권리였다. 노예제 금지라는 구속, 연방정부의 개입이라는 구속, 서부 확장을 막는 모든 제약은 제거 대상이었다.

변경의 신화는 미국이 내부 갈등을 외부로 밀어내는 구조를 가능하게 했다. 사회적 분열과 불평등, 인종 문제는 ‘다음 변경’에서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방치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서서히 붕괴해 갔다. 2008년 금융위기와 중동에서 끝나지 않는 전쟁은, 미국이 더는 세계 질서의 설계자이자 경찰로 기능할 수 없음을 보여줬다. 그런 시점에 트럼프가 등장했고, 그는 물리적 장벽을 세우겠다고 선언했다. 그 장벽은 변경 신화의 폐허 위에 세워진 기념비였다.

한때 전쟁은 분열된 남부를 포함하여 미국 사회를 통합하는 장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심지어 냉전까지, 외부의 적은 내부의 분열을 봉합하는 명분이 되었다. 루스벨트와 윌슨은 ‘국외 전쟁’과 ‘국내 개혁’을 하나의 변경 혁명으로 연결했고, 군대는 국외 확장의 도구이자 사회적 이동성을 보장하는 메커니즘이 되었다.

미국은 베트남을 새로운 변경 전쟁의 무대로 삼았지만, 균열의 서막이었다. 전쟁은 국가를 통합하지 못했고, 오히려 내부를 분열시켰다. 이념보다 계급이, 적보다 내부의 모순이 더 뚜렷이 드러났다. 탈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개인의 자율성과 자유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는 사회적 모순이 드러났다. 복지와 노조 같은 사회적 연대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에 연대의 힘이 약해졌다. 서부 신화에서 카우보이는 조합에 가입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미국의 분열은 상징의 차원에서도 드러났다. 남북전쟁의 분열 상징이었던 남부연합기는 6·25전쟁 중에는 화해의 깃발로 펼칠 수 있는 마지막 장소였다. 그러나 시민권 운동이 전개되고, 흑인 권력 운동이 성장하면서 이 깃발은 다시 본래의 얼굴을 드러냈다. 베트남 다낭에서는 분개하는 백인우월주의의 상징으로 되살아났고, 이는 미국 내 인종주의와 극단주의가 되살아나는 서막이었다.

오늘날 미국은 더 이상 팽창이 해답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인종차별, 양극화, 극단주의, 총기 난사 등 미국이 직면한 위기는 이제 외부의 전쟁이 아닌 내부의 현실이다. 외국 전쟁으로 내부를 하나로 묶던 시대는 끝났고, 이제 미국은 자기 내부와의 전쟁을 벌이는 중이다.

그 과정에서 트럼프 주의는 단절이라기보다, 변경 신화의 자연스러운 귀결로 보인다. 과거에는 외부의 변경이 통합을 가능케 했지만, 지금의 장벽은 내부의 분열을 고착한다. 백인 우월주의는 남부연합기의 부활로 상징되고, 국경 지대는 인종적 분노와 혐오가 쌓인 저장고가 되었다. 멕시코 국경은 이제 단지 경계가 아니라, 미국 사회가 회피해온 역사적 문제의 퇴적지다.

프레더릭 잭슨 터너는 “변경은 문명과 야만이 맞닿는 가장자리에 존재하는 실험실”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실험은 이제 끝났다. 남은 것은 실험의 나쁜 결과, 배제의 상흔, 해결되지 못한 모순들이다. 미국은 이제 신화를 걷어내고 현실과 대면할 때다. 팽창이 아닌 수축 속에서, 자기 성찰을 통해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변경의 시대는 끝났고, 장벽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글: 이병록 예비역 제독·국민주권전국회의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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