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록의 책을 통해 세상 읽기] 박태균의 '한국전쟁'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들은 시기와 성격에 따라 명명된다. 8·15광복과 6·25 전쟁은 임진왜란, 갑신정변의 현대식 표기다. ‘참전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에서 6.25 전쟁으로 이름하고 있고, 2012년 국방부에서 6.25 전쟁이 공식적인 용어임을 확인했다. 그러나 학자들은 미국에서 이름한 ‘The Korean War’를 그대로 옮긴 ‘한국전쟁’으로 부르는 경향이 있다.
저자는 『한국전쟁』에서 이 전쟁을 "실패의 연속"으로 규정한다. 각국은 오판과 무계획으로 일관했고, 그로 인해 남북은 물론 미국과 중국까지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그 결과는 냉전의 격화와 동북아 국제질서의 재편으로 이어졌다. 저자가 주장하는 5가지는 다음과 같다.
◆ 첫 번째 실패 – 북한의 착오와 무계획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했지만, 3일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전사(戰史)에서는 춘천 전선 때문이라고 보며, 또 다른 해석은 남한 내부 봉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라는 설이다. 그러나 서울 점령만으로 제한전(制限戰)을 마무리하고자 했다는 분석도 있다.
소련 평양대사관이 6월 15일 본국에 보낸 문서에 따르면, 북한의 계획은 서울과 한강 점령까지만 구체화하여 있었고, 이후의 목표는 “기타 지역 해방”과 “주요 인구 밀집지 및 항구 점령”이라는 추상적인 수준이었다. 북의 1주일 전 평화통일 제안이 진실이라면 통일 국회를 선포하는 것으로 전쟁을 종결할 수 있다. 실제로 국회의원을 찾아 나섰으나 대부분 피난 상태였다.
◆ 두 번째 실패 – 미국의 착각과 혼란
'노란 인종'에 대한 인종주의적 편견은 미군이 충격에 빠지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대전 전투에서의 패배는 지형지물에 대한 무지, 산악을 타고 후방을 차단한 북한군의 전술 등에 의해 초래됐다.
24연대처럼 흑인 병사들로 구성된 부대는 명령 체계나 사기 문제로 후퇴를 반복했고, 이 과정에서 민간인을 적으로 오인한 노근리 사건 같은 참극도 벌어졌다. 북한군의 게릴라 전술과 제2전선 형성은 미군의 전쟁 양상 예측을 완전히 깨뜨렸다.
◆ 세 번째 실패 – 인천상륙작전과 북측의 과소평가
인천상륙작전은 전세를 전환한 작전이었지만, 치명적인 정보 실패는 북한의 몫이었다. 중국군 임표는 이미 9월 중 인천 상륙을 예측했으며, 북한 측 문서에서도 인천 방어가 미흡했음을 인정하고 있다. 어떤 자료에 의하면 소련군은 무시했고, 중국군 채근 때문에 북한군이 최소한의 준비를 했다.
북한은 낙동강 전선 돌파에 집중하느라 인천 방어를 소홀히 했고, 결과적으로 상륙을 허용했다. 그러나 미군도 완벽한 승리는 아니었다. 서울 탈환에만 13일이 소요되었고, 그 사이 북한군은 후방에서 재편을 시작했다.
◆ 네 번째 실패 – 북진과 중국의 참전
트루먼 대통령은 9월 29일 NSC-81 지침을 통해 한국군 중심의 북진을 승인했으나, 실제로는 유엔군 전체가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이 움직임은 중국을 자극했다. 마오쩌둥은 북한이 붕괴하면 한반도와 대만에서 동시에 포위된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인해전술'은 장진호 전투와 같은 특수 상황에서나 가능했던 것으로, 서양의 중국군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 다섯 번째 실패 – 중국의 남진 중단과 전략적 유보
중국군은 1·4 후퇴 직후 유엔군을 완전히 한반도에서 축출하고 대전~안동선까지 진격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예상보다 긴 병참선, 10만 명 이상의 사상자, 그리고 추가 피해 예측이 부담되었다.
이를 두고 팽덕회와 김일성이 멱살을 잡고 싸웠다는 얘기가 있다. 결국 중국은 38선 인근에서의 교착 상태를 수용하는 '유보적 승리'에 머물렀다. 이는 전면 승리 대신 일정한 선에서 전쟁을 멈추는 결정이었다.
남북과 미국은 큰 손실을 보았으며, 중국은 인적 손실 외에도 타이완과의 통일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전쟁은 ‘누가 이겼는가?’보다 ‘어떻게 실패했는가?’를 묻는 사건이기도 하다. 침략에 대한 증오감을 부추기는 행사보다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처럼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 교훈을 찾은 것이 더 중요하다.
글: 이병록 예비역 제독·국민주권전국회의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