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파워 이설아 기자] 따뜻한 햇살이 길어지고 거리에는 봄기운이 번진다. 사람들은 대체로 봄을 회복의 계절로 기억한다. 겨우내 움츠렸던 몸과 마음이 조금씩 펴지고, 밖으로 나가고 싶은 욕구도 강해진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정신건강의 관점에서 봄은 늘 가장 조심해야 할 계절 중 하나로 꼽힌다.
전 세계적으로 봄철 자살률이 높아지는 이른바 ‘스프링 피크’ 현상이 반복해서 관찰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생동의 계절이지만, 누군가에게 봄은 오히려 가장 버거운 계절일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시기일수록 우리가 가장 먼저 돌아봐야 할 것은 거창한 마음가짐이 아니라 ‘잠’이다. 수면은 우울과 불안을 가르는 핵심 변수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기분이 가라앉을 때 자신의 감정만 들여다보지만, 정작 그 감정을 떠받치고 있는 수면의 붕괴는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그러나 잠이 무너지면 감정 조절 능력이 떨어지고, 사소한 스트레스도 크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낮에는 이유 없이 짜증이 늘고, 밤에는 생각이 꼬리를 문다. 그렇게 불면은 단순한 불편을 넘어 우울의 문을 여는 통로가 된다.
불면증은 생각보다 다양한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 어떤 이는 좀처럼 잠들지 못하고, 어떤 이는 자다가 수차례 깨며, 또 어떤 이는 새벽에 너무 일찍 눈을 뜬 뒤 다시 잠들지 못한다. 처음에는 일시적인 스트레스 탓이라 여기기 쉽다. 실제로 급성 불면은 특정 사건이나 충격이 지나가면 자연스레 호전되기도 한다.
문제는 이 상태가 습관처럼 굳어질 때다. ‘오늘도 못 자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또 다른 각성을 만들고, 침대가 휴식의 장소가 아니라 긴장의 장소로 바뀌는 순간, 불면은 하나의 질환으로 자리를 잡는다.
많은 사람이 여전히 불면증 치료를 수면제와 동일시한다. 물론 약물치료는 필요할 때 분명 도움이 된다. 며칠째 잠을 이루지 못한 사람에게 단기적인 수면 유도는 그 자체로 절실한 치료다. 다만 약물은 어디까지나 단기적 개입에 가깝다. 장기 복용으로 갈 경우 내성이나 의존성, 인지기능 저하 같은 부담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성 불면증의 근본적 치료로 더 주목받는 것이 인지행동치료다. 잘못된 수면 습관과 왜곡된 생각을 바로잡는 방식의 치료는 대한수면학회와 미국수면학회 등에서도 1차 치료로 권고된다. ‘잠은 억지로 청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배워야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 치료의 의미는 분명하다.
최근에는 디지털 기반 인지행동치료가 그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동안 대면 치료는 여러 차례 교육 세션이 필요하고 비용과 시간, 전문 인력의 한계도 있었다. 하지만 디지털 치료는 접근성을 높였고, 약물 부작용이 부담스럽거나 복용을 줄이고 싶은 이들에게 현실적인 선택지가 되고 있다.
무엇보다 인지행동치료는 환자 스스로 반복 연습을 통해 수면 습관을 다시 세우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힘이 있다. 한 번 건강한 패턴이 자리 잡으면 그 효과가 1~2년 이상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잠을 ‘주입’받는 것이 아니라,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정신건강을 지키는 일은 결국 일상에서 시작된다. 밤마다 스마트폰을 놓지 못하면서 잠이 오지 않는다고 호소하는 모습은 이제 낯설지 않다. 잠자기 직전까지 화면을 들여다보는 습관, 식사 시간에도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 스마트폰, 낮과 밤의 경계가 흐려진 생활은 수면을 망가뜨리는 가장 흔한 배경이 된다.
결국 필요한 것은 거창한 결심보다 단순한 원칙이다. 같은 시간에 자고 같은 시간에 일어나는 것, 취침 전 스마트폰 사용을 줄이는 것, 카페인과 음주를 조절하는 것, 그리고 몸을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규칙적인 신체활동이 항우울제에 준하는 효과를 낸다는 설명은 그래서 가볍게 넘길 말이 아니다.
암 경험자라면 이 문제는 더 무겁게 다가온다. 몸의 병을 견뎌낸 사람에게 마음의 병은 종종 뒤늦게 찾아온다. 치료 과정에서 누적된 불안, 재발에 대한 공포, 일상 회복의 압박은 우울과 불안, 불면, 감정기복, 분노조절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럴 때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병행하는 것은 결코 특별한 선택이 아니다. 오히려 삶의 질을 지키기 위한 자연스러운 치료의 연장선에 가깝다.
아직도 정신과 약물을 두고 중독되거나 평생 먹어야 한다는 식의 오해가 남아 있지만, 실제로는 안전성이 높고 중독 가능성이 낮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병을 숨기지 않듯 마음의 고통도 더는 숨길 일이 아니다.
어디에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도 중요하다. 비교적 가벼운 증상이 있거나 충분한 상담이 필요한 경우라면 개인 의원이 더 적합할 수 있다. 반면 양극성장애나 조현병, 치매 같은 중증 정신질환이 있거나 신체질환이 함께 있는 경우, 또는 자살 위험이 높다면 대학병원 진료가 필요하다.
가장 위험한 것은 ‘이 정도는 버틸 수 있다’며 방치하는 태도다. 불면과 함께 자해나 자살 충동이 스치거나, 학업과 직장생활이 흔들릴 정도라면 더 미루지 말아야 한다. 정신건강의 문제는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치료가 필요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암 경험자의 정신건강 관리 방법으로 명상과 마음챙김이 있다. 현재의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판단 없이 받아들이는 연습은 불안과 집착을 누그러뜨리는 데 도움이 된다. 특히 마음챙김 기반 스트레스 감소 프로그램, 이른바 MBSR이 여러 의료기관에서 활용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더 본질적인 조언은 따로 있다. ‘꼭 그래야만 한다’는 경직된 사고에서 조금 벗어나는 것,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현실 앞에서도 유연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고통을 무조건 밀어내야 할 대상으로만 여기지 않고, 나를 이해하는 계기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생각보다 큰 힘을 만든다.
봄은 모두에게 같은 얼굴로 오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새 출발의 계절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잠이 깨지고 마음이 흔들리는 계절이다. 그래서 봄철 정신건강 관리의 출발점은 ‘괜찮아 보여도 괜찮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다. 그리고 그 신호는 생각보다 자주, 잠에서 시작된다.
잘 자지 못하는 밤이 이어진다면 그것은 단순한 피로가 아니라 마음이 보내는 구조 신호일 수 있다. 봄을 견디는 일에 필요한 것은 의외로 단순하다. 내 마음을 다그치기보다 먼저 잠을 살피고, 혼자 버티기보다 필요할 때 도움을 청하는 것. 그 태도가야말로 계절을 무사히 건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