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파워 이경호 기자] 퇴직연금 적립금이 처음으로 500조원을 넘어섰다. 지난해 국내 증시 호황과 실적배당형 상품 투자 확대가 맞물리며 연간 수익률도 제도 도입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지만, 가입자 상당수는 여전히 낮은 수익률 구간에 머문 것으로 나타났다.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은 20일 ‘2025년 우리나라 퇴직연금 투자 백서’를 통해 지난해 말 기준 퇴직연금 적립금이 501조4000억원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전년 말 431조7000억원보다 69조7000억원 늘어난 규모다. 증가율은 16.1%로, 퇴직연금 적립금은 400조원을 넘어선 지 1년 만에 500조원대에 진입했다.
제도 유형별로는 확정급여형(DB)이 228조9000억원으로 전체의 45.7%를 차지했다. 확정기여형·기업형 IRP(DC)는 141조6000억원으로 28.2%, 개인형 IRP는 130조9000억원으로 26.1%였다.
비중 변화는 뚜렷했다. DB는 여전히 가장 큰 규모를 유지했지만 전체 적립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낮아졌다. 반면 IRP는 전년 대비 32조2000억원 늘며 32.6% 증가했다. 세제 혜택과 사업자 홍보, 개인의 노후 준비 수요가 맞물리며 IRP 성장세가 가팔라진 것으로 분석된다.
운용 방식에서는 안정형 쏠림이 여전했다. 전체 적립금 501조4000억원 중 원리금보장형은 378조1000억원으로 75.4%를 차지했다. 실적배당형은 123조3000억원으로 24.6%였다.
다만 실적배당형 비중은 빠르게 늘고 있다. 전년보다 7.2%포인트 상승했으며, 특히 가입자가 직접 운용하는 DC와 IRP에서 변화가 컸다. 실적배당형 비중은 DC가 33.0%, IRP가 44.3%로 각각 전년보다 9.7%포인트, 10.8%포인트 올랐다.
ETF 투자는 퇴직연금 시장의 핵심 변화로 떠올랐다. 퇴직연금계좌를 통한 ETF 투자잔액은 48조7000억원으로 전년 21조원보다 131.9% 증가했다. 2023년 9조원에서 2024년 21조원, 2025년 48조7000억원으로 3년 연속 100%대 증가율을 기록했다.
ETF는 전체 실적배당형 적립금 123조3000억원의 39.6%를 차지했다. 주식과 채권 등 다양한 자산군에 분산 투자할 수 있다는 점에서 퇴직연금의 주요 투자 수단으로 자리 잡는 모습이다.
TDF도 성장했다. 은퇴 시점에 맞춰 자산 배분을 자동으로 조정하는 생애주기펀드(TDF)의 퇴직연금 투자금액은 20조1000억원으로 전년 13조4000억원보다 50% 증가했다. 전체 TDF 순자산 25조6000억원 가운데 78.5%가 퇴직연금을 통해 투자됐다.
수익률은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2025년 퇴직연금 연간 수익률은 총비용 차감 후 6.47%로, 2005년 제도 도입 이후 가장 높았다. 전년 4.77%보다 1.70%포인트 상승했다.
그러나 비교 대상에 따라 평가는 엇갈린다. 지난해 코스피가 75.63% 상승했고, 국민연금 수익률은 19.9%를 기록했다. 미국 캘퍼스와 일본 GPIF 등 글로벌 연기금도 각각 12%대 수익률을 냈다. 퇴직연금 수익률이 역대 최고였음에도 노후 자산 증식 측면에서는 아쉬움이 남는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운용 방식별 격차는 컸다. 원리금보장형 수익률은 3.09%에 그쳤지만, 실적배당형 수익률은 16.80%였다. 실적배당형 수익률이 원리금보장형의 5배를 넘은 셈이다.
제도 유형별로도 실적배당형 비중이 높은 계좌일수록 수익률이 높았다. IRP는 9.44%로 가장 높았고, DC는 8.47%, DB는 3.53%였다.
권역별로는 증권권역 수익률이 9.79%로 가장 높았다. 은행은 5.70%, 생명보험은 4.53%, 근로복지공단은 4.16%, 손해보험은 3.81%였다. 증권권역은 실적배당형 비중이 45.2%로 상대적으로 높아 수익률 상승 폭도 컸다.
하지만 평균 수익률 뒤에는 큰 격차가 숨어 있었다. 백서의 심층분석에 따르면 2025년 수익률 상위 10% 가입자는 적립금의 84%를 실적배당형에 투자했다. 이들의 적립금 증가분 중 67%는 운용수익에서 나왔다.
반면 하위 10% 가입자는 적립금의 74%를 원리금보장형으로 운용했다. 적립금 증가분의 77%는 납입 원금이었고, 운용수익 비중은 23%에 머물렀다. 자산시장이 상승했지만 운용에 나서지 않은 계좌는 상승 효과를 충분히 누리지 못한 것이다.
고용부와 금감원은 이를 ‘평균의 함정’으로 설명했다. 전체 연간 수익률은 6.47%였지만, 가입자 절반은 2%대 수익률에 머물렀다. 물가 상승률을 겨우 방어하는 수준이다.
장기 운용에서는 차이가 더 커진다. 매년 1000만원씩 20년 동안 총 2억원을 납입했다고 가정할 경우 적극적으로 자산 배분을 한 포트폴리오는 약 4억3000만원으로 불어나는 반면, 대부분 원리금보장형으로 운용한 경우 약 2억7000만원에 그쳤다. 같은 금액을 넣어도 운용 방식에 따라 약 1억6000만원의 차이가 발생했다.
퇴직급여 수령 방식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2025년 중 만 55세 이상 퇴직연금 수급을 시작한 계좌 60만1000좌 가운데 연금 수령을 선택한 계좌는 9만9000좌로 16.5%였다. 일시금 수령은 50만2000좌로 83.5%였다.
계좌 수 기준으로는 일시금 수령이 여전히 많았지만, 금액 기준으로는 연금 수령 비중이 처음으로 60%를 넘어섰다. 총 수급 개시 금액 23조9000억원 중 14조7000억원, 61.6%가 연금으로 수령됐다.
연금 수령 계좌의 평균 수령액은 1억4891만원으로, 일시금 수령 평균액 1833만원의 8.13배였다. 적립금 규모가 작을수록 일시금으로 받는 경향이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고용부와 금감원은 가입자의 운용 선택을 돕기 위한 제도 보완도 추진한다. 올해 하반기 퇴직연금 가이드북을 발간해 적립부터 운용, 인출까지 실제 사례 중심으로 안내할 계획이다.
디폴트옵션 제도 개선도 예고했다. 디폴트옵션은 가입자가 일정 기간 운용 지시를 하지 않을 경우 사전에 정한 상품으로 적립금이 자동 운용되는 제도다. 지난해 말 기준 디폴트옵션 적립금은 53조3000억원이었지만, 전체 수익률은 3.69%에 그쳤다.
이는 안정형 비중이 85.4%로 과도하게 높은 영향으로 분석됐다. 안정형 수익률은 2.63%였지만, 중립투자형은 10.81%, 적극투자형은 14.93% 수익률을 기록했다.
고용부와 금감원은 승인 후 일정 기간이 지난 디폴트옵션 상품에 대해 평가를 실시하고 변경이나 승인 취소를 검토하는 등 수익률 제고를 위한 제도 개선을 이어갈 방침이다. 또 직접 운용이 어려운 가입자를 위해 기금형 퇴직연금제도 도입도 추진한다.
고용부와 금감원은 “퇴직연금 운용은 가입자의 선택에 달려 있지만, 방법을 몰라 자산시장에서 소외되는 일이 없도록 제도와 인프라를 정비하겠다”며 “앞으로 매분기 퇴직연금과 연금저축 운용현황을 보도자료로 배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