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파워 한승호 기자] 국내 석유화학산업의 위기는 한두 해의 업황 반등만으로 해결되기 어렵다. 중국 자급화, 글로벌 공급과잉, 원가 경쟁력 약화, 탄소규제 강화가 동시에 맞물린 만큼 단기 처방과 중장기 구조전환을 함께 추진해야 한다.
한국고용정보원은 국내 석유화학산업이 내수 대비 과도한 설비를 구축하고, 규모의 경제로 원가를 낮춰 수출하던 기존 중화학공업의 성공 방식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단기적으로는 긴급 경영·고용 안정 지원과 원가 경쟁력 제고가 필요하고, 중장기적으로는 고부가가치·친환경 중심 산업구조 전환과 인력의 질적 전환이 병행돼야 한다는 내용이다.
우선 단기 과제는 생존과 고용 유지다. 보고서는 업황 부진이 길어지는 상황에서 긴급경영안정자금, 지방투자촉진보조금, 금융 만기연장, 보증 연계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특히 영세한 하류 부문 중소기업을 우선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고용 측면에서는 고용유지지원금, 단축근로 지원, 생활안정자금 융자 확대가 필요하다고 제시했다. 산업위기지역과 고용위기지역에는 지원 수준을 우대하고, 기업이 유·무급 휴업·휴직을 시행할 때 인건비 부담을 낮춰 정리해고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가 부담 완화도 단기 과제로 꼽혔다. 보고서는 생산 원가 중 원료비와 유틸리티 비용이 90% 이상을 차지한다는 점을 고려해 기초 원자재 무관세화, 산업용 전기요금 한시적 인하 등 원가 절감 지원이 필요하다고 봤다. NCC 기반 국내 업체는 유가 변동에 따른 원가 경쟁력 변동성이 큰 만큼 나프타 등 원료 가격 안정화 지원도 검토해야 한다는 제언이다.
하지만 단기 지원만으로는 부족하다. 보고서는 범용제품 중심에서 스페셜티와 고부가가치 제품 중심으로의 전환을 생존의 핵심으로 봤다. 중국·중동 기업과 가격 경쟁을 계속하기보다 전자재료, 의료소재, 친환경 소재, 배터리·반도체용 고기능성 화학제품 등으로 포트폴리오를 고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부의 R&D 지원과 설비투자 세액공제 확대가 필요하다. 특히 석유화학 탈탄소 공정을 국가전략기술이나 신성장원천기술로 반영하고, 상용화에 필수적인 실증 설비에 대한 세액공제 적용 범위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제안도 담겼다.
저탄소 전환은 별도 과제가 아니라 수출 경쟁력의 조건이다. 보고서는 화석연료 기반 NCC를 전기·수소·암모니아 기반으로 전환하기 위한 원천기술 R&D를 집중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U의 CBAM과 미국의 청정경쟁법 등 글로벌 탄소규제 강화에 대응하려면 바이오 플라스틱, 화학적 재활용, CCUS 관련 투자를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산단 전환도 중요하다. 여수, 울산, 대산 등 3대 석유화학단지는 이미 대형 설비와 인프라가 집중돼 있다. 이를 기반으로 폐화학물 재처리 시설, 에너지·자원 순환 체계, 스마트그린산단 모델을 구축하면 기존 산업 기반을 살리면서 새로운 경쟁력을 만들 수 있다.
고용전략은 산업전략과 함께 가야 한다. 산업 전환 과정에서는 기존 범용제품 생산 인력 수요가 줄고, 공정제어, 소재개발, 품질관리, 환경관리, CCUS, 재활용, 스마트플랜트 등 신기술 분야 인력 수요가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보고서는 기존 근로자의 업스킬링과 리스킬링을 강조했다. 제조공정 자동화·자율화 기술, 스마트플랜트 구축·설계, 품질관리 등 실태조사에서 수요가 높게 나타난 분야를 우선 교육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 재취업 지원이 아니라 산업 전환에 맞춘 직무전환 체계가 필요하다.
숙련공 문제도 놓칠 수 없다. 석유화학 생산현장은 장기간 숙련이 필요한 공정이 많다. 생산직 중심 고령화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숙련 인력이 대거 퇴진하면 기술 전승 공백이 생길 수 있다. 보고서는 숙련 전수 프로그램과 현장 기술인력 양성 체계를 강화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청년 인재 유입도 과제다. 지방근무 기피, 교대근무 부담, 근로조건 미스매치가 지속되면 신규 인력 확보는 더 어려워진다. 보고서는 직무 개선과 처우 향상, 스마트 제조기술 도입을 통해 고학력 청년층이 들어올 수 있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봤다.
결국 석유화학 재도약의 조건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범용제품에서 스페셜티로, 고탄소 공정에서 저탄소 공정으로, 기존 인력 유지에서 직무전환과 전문인력 양성으로 이동해야 한다.
위기의 본질이 구조라면 해법도 구조적이어야 한다. 금융지원은 시간을 벌어주는 역할을 할 수 있지만, 그 시간을 제품과 공정, 인력, 산단의 체질개선에 쓰지 못하면 같은 위기는 반복될 수 있다.
한국 석유화학산업은 여전히 세계 4위권 생산능력과 축적된 공정기술, 주요 제조업과 연결된 공급망 기반을 갖고 있다. 남은 과제는 이 기반을 범용제품 가격 경쟁에 묶어둘 것인지, 고부가·저탄소 산업으로 옮겨갈 것인지다. 보고서가 던지는 결론은 분명하다. 산업전환과 고용전환을 함께 설계해야 석유화학산업의 연착륙과 재도약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