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경쟁, 칩·모델 넘어 전력→인프라→응용까지 ‘풀스택’ 수직통합
엔비디아·구글·아마존·MS 등 자체 생태계 확대…락인 효과 강화
한국 세계 1위권 HBM도 전체 스택에선 한 요소…AX 핵심 공급기반 해외 의존
산업연 "도입·확산만 앞세우면 글로벌 플랫폼 종속 심화될 수 있어"
위 사진은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으로 AI(인공지능)를 활용해 생성된 가상의 이미지입니다.
[더파워 한승호 기자] 한국 제조업이 인공지능 전환(AX)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AI를 많이 도입하는 것만으로 산업 주도권까지 확보하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나왔다. 글로벌 AI 경쟁이 반도체나 모델 하나의 성능을 겨루는 단계를 넘어 전력과 칩, 데이터센터, 모델, 응용서비스까지 하나로 묶는 ‘풀스택’ 경쟁으로 옮겨가면서다.
8일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현재 국내 제조기업의 AX 확산은 빠르게 추진되고 있지만 이를 실제 구동하는 핵심 공급 기반은 상당 부분 해외 기술에 의존하고 있다. 산업연구원은 공급역량을 갖추지 않은 채 AI 활용만 확대할 경우 과거 소재·부품·장비 공급망에서 겪었던 해외 의존 문제가 AX 분야에서 반복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과거 일본의 수출규제로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공급이 흔들렸을 당시 한국은 완성품 분야에서 높은 경쟁력을 갖추고도 핵심 공급망의 취약성을 확인했다. 산업연구원은 AI 역시 최종 제조기업의 활용 능력뿐 아니라 그 아래에서 AI를 공급하고 작동시키는 기반을 누가 보유하느냐가 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구조로 변하고 있다고 봤다.
AI 경쟁의 판 자체도 달라졌다. 엔비디아가 제시한 ‘5-Layer Cake’는 AI 산업을 에너지와 칩, 인프라, 모델, 응용의 다섯 계층으로 구분한다. 전력으로 데이터센터와 연산을 돌리고 GPU가 학습과 추론을 처리하며, 대규모 인프라에서 범용 지능을 생산한 뒤 모델과 응용서비스로 경제적 가치를 만드는 구조다.
특히 대규모 데이터센터와 수만개의 프로세서를 운영하는 인프라 계층은 단순한 데이터 저장시설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지능을 생산하는 공장’이라는 의미에서 AI 팩토리로 불린다.
핵심은 어느 한 계층에서 우위를 확보했다고 전체 AI 산업의 주도권을 갖는 구조가 아니라는 점이다. 산업연구원은 한국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한 고대역폭메모리(HBM) 역시 전체 AI 생산 스택 가운데 칩 계층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라고 설명했다.
반대로 다섯 계층을 통합하는 기업은 각 계층에서 만들어지는 가치를 자사 생태계 안에 묶어둘 수 있다. 개발도구와 소프트웨어, 하드웨어가 연결될수록 사용자가 다른 생태계로 이동하기 어려워지는 락인 효과도 커진다.
엔비디아가 대표적이다. GPU에서 출발했지만 CUDA를 기반으로 개발자 생태계를 확보한 뒤 가상 물리환경을 구현하는 옴니버스, 합성 학습데이터를 만드는 코스모스, 로봇 학습·검증을 위한 아이작, 현장 실행용 젯슨까지 연결하고 있다. 칩을 파는 기업에서 피지컬 AI 개발·실행 과정 전체를 묶는 사업자로 영역을 확대하는 구조다.
구글과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는 클라우드를 출발점으로 자체 칩과 AI 모델, 응용서비스를 함께 묶고 있다. 구글은 TPU와 제미나이, 클라우드와 응용서비스를 연결하고 있으며 아마존은 트레이니엄과 AWS, 베드록을 결합했다. 마이크로소프트 역시 자체 칩 마이아와 애저, 오픈AI와의 협력, 코파일럿을 연결하고 있다.
모델 기업도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오픈AI와 앤스로픽은 AI 모델에서 출발해 칩과 연산 인프라로 사업 범위를 넓히며 특정 하드웨어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려 하고 있다. 중국 화웨이는 칩부터 소프트웨어, 모델과 클라우드까지 국가 단위의 자립형 스택을 구축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테슬라와 xAI는 또 다른 형태다. 자동차와 로봇, 공장 등 실제 물리 공간에서 발생하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자체 칩과 슈퍼컴퓨터, AI 모델, 자율주행과 로봇을 연결한다. 산업연구원은 이 같은 피지컬 AI 통합형 경쟁에서는 현장 데이터와 설비에 대한 운영기술이 핵심 자산이 된다고 분석했다.
글로벌 경쟁은 기업을 넘어 국가 단위로도 확산되고 있다. 미국은 첨단 칩과 장비에 대한 수출통제를 통해 경쟁국의 AI 생산 스택 구축을 제한하는 한편 자국 기업이 확보한 기술과 표준의 우위를 강화하고 있다.
중국은 거대한 제조 기반과 내수시장을 활용한다. 집중적인 자원 투입과 조달을 통해 자체 스택을 검증하고 대규모 제조 현장에서 데이터를 축적하는 방식이다. 다만 산업연구원은 중국이 소프트웨어 성숙도와 HBM, 첨단 패키징, 선단 공정에서는 제약을 안고 있다고 평가했다.
유럽연합(EU)은 미국이나 중국과 달리 산업 데이터의 주도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Gaia-X와 Catena-X, Manufacturing-X 등을 통해 기업 간 제조 데이터를 공유하는 규칙과 데이터 주권을 제도화하는 전략이다. 반면 모델과 연산, 반도체 등 AI 생산 스택의 상위 영역에서는 자체 역량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한계가 제시됐다.
산업연구원이 경고하는 지점은 국내 AX 정책의 방향이다. AI 도입기업이 늘어나고 제조현장의 AI 활용도가 높아지더라도 이를 공급하는 플랫폼과 인프라가 해외 기업에 집중돼 있다면 AX 확대가 국내 AI 산업의 성장으로 그대로 연결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해외 스택을 사용하는 기업이 많아질수록 개발도구와 데이터 구조, 운영 방식까지 특정 생태계에 맞춰지고 전환비용이 커질 수 있다. AI 활용 확대가 해외 플랫폼의 영향력을 동시에 높이는 역설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의미다.
산업연구원은 범용 AI 생산 스택 전체를 한국이 추격하는 것은 자본과 규모 측면에서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진단했다. AI 경쟁에서 한국이 풀어야 할 문제도 엔비디아와 같은 거대한 범용 AI 스택을 그대로 복제하는 데 있지 않다고 봤다.
결국 한국 제조업의 AX 경쟁력은 AI를 얼마나 빨리 도입했느냐만으로 결정되기 어렵다. 반도체·디스플레이에서 완성품 경쟁력을 갖추고도 핵심 소재의 해외 의존이 산업안보 문제로 돌아왔던 것처럼, AI에서도 수요 확산 아래에 어떤 공급 기반을 구축하느냐가 새로운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