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이후 부랴부랴 협력업체에 ‘공동수급 추가 약정서’ 날인 요구...자체 설치팀 있는데도 외주 맡기는 까닭은
지난 8일 판교 제2테크노밸리에서 발생한 승강기 추락사고와 관련해 현대엘리베이터의 도덕적 해이가 논란이 되고 있다. 사진은 승강기 추락 사고현장 [사진제공=연합뉴스]
[더파워=김필주 기자] 현대엘리베이터가 최근 경기도 판교 제2테크노밸리 공사현장에서 발생한 승강기 추락 사망사고로 모럴헤저드 논란에 휩싸였다.
지난 8일 오전 10시경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판교 제2테크노밸리 한 건물 신축 공사현장에서 승강기가 갑자기 지하 5층까지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인해 승강기 설치 작업을 하던 현대엘리베이터 협력업체 A사 근로자 2명이 세상을 떠났다.
고용노동부·경찰 등은 시공업체인 요진건설산업과 승강기 제조사이자 협력업체에 설치 업무를 맡긴 현대엘리베이터 등을 상대로 중대재해처벌법·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주목할 부분은 현대엘리베이터가 사고 이후 사망 근로자들이 소속된 A사에 ‘공동수급 추가 약정서’와 ‘공동수급체 구성원 변경 합의서’를 보내고 날인해달라고 요구했다는 점이다. 이 서류에는 요진건설산업과 현대엘리베이터가 지난해 5월 체결한 판교 제2테크노밸리 승강기 설치 공사 계약의 당사자를 ‘현대엘리베이터 공동수급체’로 변경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지난 2020년 4월 고용노동부·국토교통부 등 4개 부처는 원도급사가 승강기 설치공사를 공동수급(승강기 제조업체+설치공사업체 컨소시엄) 형태로 하도급할 경우 공동수급 협정서를 발주자에 제출하고 발주자는 이를 기초로 하도급 계약의 적정성을 판단토록 한 ‘승강기 작업장 안전강화 대책’을 발표한 바 있다.
이는 그동안 승강기 제조업체가 일방적으로 계약 내용을 결정하고 설치공사업체에 업무지시를 하는 등 불법 하도급 사례가 만연해 있다는 지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겨레’ 보도 내용에 따르면 현대엘리베이터는 작년 5월 판교 제2테크노밸리 해당 공사현장에 승강기를 납품하기로 한 뒤 설치 업체를 결정하지 못하다가 지난달 말 급하게 A사를 투입했고 계약서도 작성하지 않았다.
A사는 지난 말부터 이미 승강기 공사에 착수한 상태였으며 현대엘리베이터 측은 사고가 일어난 뒤에야 공동수급 추가 약정서를 확정하려 한 것이다. 이 약정서에는 시공사 요진건설산업의 날인도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일각에서는 공사 착수 전 현대엘리베이터와 A사가 체결한 안전준수협약서도 문제 삼고 있다. 협약서에는 “만일 안전예방조치 등을 소홀히 해 발생하는 모든 안전사고에 대해서는 협력사가 민·형사상의 모든 법적책임을 진다”고 적혀 있으며 “이에 따라 발생하는 현대엘리베이터의 손해와 비용(각종 소송 발생시 변호사 비용 등 포함) 일체를 보상하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을 서약한다”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이유로 현대엘리베이터가 안전사고 발생 시 협력업체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려 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지고 있다.
현대엘리베이터 관계자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공동수급 추가 약정서 사후 날인 요구와 관련해서는 “현재 고용부 수사가 이뤄지고 있어 답변하기가 곤란하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안전준수협약서에 대해서는 “협력사가 안전예방의무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내용을 강조한 것이지 책임을 떠넘기려 한 것은 아니다”라며 “만일 협력업체가 안전예방의무를 이행했음에도 불가피하게 사고 등이 발생했다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현대엘리베이터, 공사금액 적어 중대재해처벌법 적용은 어려워
고용부 등의 수사 과정에서 현대엘리베이터의 산업안전보건법 안전조치의무 위반이 확인되더라도 현대엘리베이터에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은 적용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이는 건설공사는 공사금액이 50억원 이상이어야만 중대재해처벌법 적용이 가능한데 이번 승강기 추락 사고가 발생한 현장의 공사금액은 약 5억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수사를 진행 중인 고용노동부 경기지청 광역중대재해관리과 관계자는 “현재 사고 관련 업체 전부를 대상으로 수사를 진행 중이라 자세한 내용은 언급하기 어렵다”면서 “다만 공동수급약정서 지연 날인 등과 같은 의심스러운 부분 모두를 수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수사 완료 시점은 정확히 말씀드리기 어려우나 수사 결과가 나오는 대로 고용부 본청 보도자료 등을 통해 설명할 예정”이라며 “수사 과정 중 필요시에는 피해 당사자인 협력업체도 조사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고용노동부 본청 관계자는 “중대재해처벌법 부칙상 건설공사의 경우 공사규모 50억원 이상 사업장에 중대재해처벌법을 적용하고 있다”며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면피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는 “공사규모에 상관없이 경영주나 안전관리 책임자의 안전의무 이행 부실 등으로 사고가 발생했다면 이들에게 중대재해처벌법은 적용할 수 없지만 기존과 마찬가지로 형법(업무상과실치사)이나 산업안전보건법 등이 적용된다”고 부연했다.
민주노총 전국건설노동조합 관계자는 “현대엘리베이터이터의 경우 자체 설치팀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 수급 약정서를 통해 따로 설치업체를 두는 것은 한마디로 ‘위험의 외주화’를 하겠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뒤이어 “승강기 사고는 공사현장에서 승강기를 설치하는 과정에서 주로 일어난다”며 “정부는 지금이라도 보다 촘촘한 중대재해처벌법 개정을 통해 근로자들이 현장에서 목숨을 잃는 사고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