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파워 한승호 기자] AI와 에너지 안보를 둘러싼 글로벌 경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한국·미국·일본 3국의 산업협력을 구체화해야 한다는 제안이 나왔다. 대한상공회의소와 한미협회는 서울 중구 대한상의 회관에서 ‘제6회 한미 산업협력 컨퍼런스’를 열고 한미일 산업협력 방안을 논의했다고 지난 7일 밝혔다.
이번 컨퍼런스에서는 AI 데이터센터용 반도체 공동 개발, 피지컬 AI 실험실, 스타트업 공동 활용 AI 인프라 허브, 소형모듈원전(SMR) 신속 인허가 협력체계, LNG 공동 투자 등 3국 협력 과제가 제시됐다. 대한상의는 이날 논의된 내용을 바탕으로 일본 경제단체 등과 실무협의를 이어갈 계획이다.
권석준 성균관대 교수는 AI 생태계가 학습 중심에서 추론 중심으로 옮겨가고 있으며, 단순 성능 경쟁도 전성비와 가성비 경쟁으로 구체화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권 교수는 “한미일은 전성비 높은 AI 컴퓨팅 인프라 확보를 위해 컴퓨팅·에너지·냉각 관련 인프라 기술 공동연구개발 플랫폼과 표준 협의체를 구성해야 한다”며 “가성비 높은 AI 데이터센터 전용 시스템·메모리반도체 개발을 위한 공동연구센터, 이른바 ‘아시아판 IMEC’를 공동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피지컬 AI 분야에서는 3국이 보유한 제조·AI·로봇 기술을 결합하는 방안이 제안됐다. 안홍준 한국인공지능·소프트웨어산업협회 본부장은 “한국의 제조 데이터, 미국의 AI 모델·슈퍼컴퓨팅 자원, 일본의 로봇 제어 기술을 결합한 ‘3국 공동 피지컬 AI 테스트베드’ 구축을 검토할 만하다”고 밝혔다. 그는 공동 실증 성과를 바탕으로 중동·동남아·중남미 시장에 ‘AI 풀스택 패키지’로 수출하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스타트업의 AI 인프라 접근성을 높이자는 제안도 나왔다. 이세영 생성AI스타트업협회 협회장은 “한국 AI 스타트업이 글로벌로 확장할 때 미국 GPU 클라우드 인프라에 대한 접근은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다”며 “한미일 3국의 혁신 스타트업들이 각 시장으로 서비스 확장을 원활히 이뤄낼 수 있도록 3국이 공동으로 활용 가능한 AI 컴퓨팅 크레딧 프로그램과 공동 인프라 허브 구축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AI 협력의 전제 조건으로 규제 체계의 조율 필요성도 거론됐다. 하부카 히로키 전략국제문제연구소 AI센터 수석연구원은 영상 발표에서 “세 나라 간 AI 협력을 가로막는 주요 병목 중 하나는 각국의 규제 방식이 점점 더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한국은 AI 기본법을 통한 포괄적 규제체계, 미국은 분야별 규제와 소송·시장경쟁 중심 체계, 일본은 사후규제와 이해관계자 참여 절차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민간부문이 앞장서 ‘규제 상호운용성’을 높여 기업들이 규제환경을 보다 효율적이고 예측 가능하게 헤쳐 나갈 수 있도록 돕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에너지 분야에서는 LNG와 원전 협력 방안이 집중적으로 논의됐다. 제인 나카노 전략국제문제연구소 에너지안보·기후변화 수석연구원은 영상 발표를 통해 “AI 수요 대응을 위해 한미일은 신뢰 가능하고 청정한 에너지 확보가 필수 과제”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과 일본이 미국 가스전 개발뿐 아니라 액화설비, 저장시설, 수출터미널, 선적부두 등 LNG 수출 인프라에 공동 투자해 미국산 에너지 공급을 확보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비상시 공급 차질에 대비해 미국산 원유를 공동 비축하는 방안도 언급했다.
조홍종 단국대 교수는 “3국 공조는 생존의 문제”라며 미국 신규 액화터미널 투자, 동북아 통합 LNG 허브 구축과 함께 SMR 협력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조 교수는 미국의 원천기술, 일본의 정밀 부품과 금융, 한국의 시공·기자재 역량을 결합한 협력 모델을 제시했다.
그는 “SMR의 제3국 공동 진출이 좋은 선택지가 될 수 있지만 각국의 서로 다른 규제와 인증제도가 걸림돌이 된다”며 규제당국 간 설계인증 상호참조로 중복심사를 줄이고 인허가 기간을 단축하는 ‘SMR 패스트트랙’을 제안했다.
노백식 한국원자력산업협회 상근부회장은 “AI 확산으로 전력 수요가 늘면서 원자력이 다시 주목받고 있지만, 해외 사례를 보면 공급망 부족과 공기 지연, 숙련 인력 부족 등 공통 과제도 크다”고 말했다. 이어 “한미일이 차세대 원전 공동 R&D와 대형·SMR 원전 공급망 얼라이언스를 추진하고 신규 사업에도 공동 투자한다면 좋은 협력 사례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에너지 협력을 국가 안보 차원에서 봐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안세현 서울시립대 정경대 학장은 “에너지는 더 이상 상품이 아니라 국가 안보 최우선 전략자산이며, 특히 한국과 미국은 수요자-공급자 관계이자 기술 파트너로서 강한 상호보완성을 갖는다”고 말했다. 그는 원유·가스·원전·전략비축유·핵심광물뿐 아니라 해양 에너지, 초크포인트, 제3지역 공동 진출까지 협력 의제를 넓혀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날 행사에는 최중경 한미협회 회장, 이형희 서울상공회의소 부회장, 여한구 산업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 제임스 헬러 주한미국대사관 대사대리, 제임스 킴 주한미국상공회의소 회장, 성윤모 중앙대학교 석좌교수, 안세현 서울시립대 정경대학 학장 등 업계 전문가와 기업인 120여명이 참석했다.
최중경 회장은 개회사에서 “한미일 산업협력은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산업동맹이 될 것”이라며 “정교하게 설계된 공급망과 상호 보완적 기술 협력을 통해 실질적 성과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상호 이익과 균형은 필수”라며 “한쪽의 이익만 강조되는 불균형은 결국 신뢰를 무너뜨리고 동맹 전체에 해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성윤모 중앙대학교 석좌교수는 기조 발표에서 “한미일 산업협력의 가치는 ‘규모와 범위의 경제 추구’를 통한 효율성과 안보공조 및 상호 기술보완을 통한 안정성을 동시에 꾀할 수 있다는 점”이라며 “특히 기술경쟁이 날로 치열해지는 AI, 반도체, 에너지, 조선 분야 등에서 3국의 협력이 유의미하다”고 말했다.
이형희 서울상의 부회장은 환영사를 통해 “최근 국제통상질서와 공급망 체계 재편에 따라 수출주도형 국가인 한국과 일본은 구조적 도전 극복을 위해 합심할 유인이 커졌다”며 “한미일 3국의 동맹관계 안에서 협력이 이뤄질 때 더 큰 안정성과 지속성을 가질 수 있다”고 전했다. 이어 “한미일 3국의 산업생태계가 더 긴밀히 연결될 수 있게 민간 차원의 협력을 강화해 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