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파워 한승호 기자] 인공지능(AI) 확산이 노동시장의 구조를 빠르게 흔들고 있다. 단순히 일자리가 줄어드는 문제가 아니라, 기존 직무의 과업이 재편되고 근로자에게 요구되는 역량이 달라지는 변화라는 진단이 나왔다.
한국경제인협회는 지난 7일 서울 여의도 FKI타워 컨퍼런스센터에서 ‘AI와 일자리의 공존: 노동시장의 구조적 변화와 대응전략’ 세미나를 열었다. 이날 세미나에서는 AI 전환기에 생산성 향상과 고용 안정을 동시에 달성하기 위한 교육훈련, 직무 재설계, 인력 전환 전략이 논의됐다.
김창범 한경협 부회장은 개회사에서 AI 시대에 맞는 새로운 고용 패러다임을 모색해야 한다고 밝혔다. 과거 산업화 시대의 경직된 노동시장 구조만으로는 글로벌 기업들이 추진하는 AI 기술 경쟁과 비즈니스 모델 변화에 대응하기 어렵다는 취지다.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도 영상 축사를 통해 AI 전환이 생산성을 높이는 동시에 특정 직무와 인력층에는 고용불안을 키우는 이중적 변화를 만들고 있다고 진단했다. 정부는 산업·직무별 영향을 살피고 노동자 역량 제고와 맞춤형 안전망을 강화하는 고용안정 정책을 준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첫 번째 발제자로 나선 스테인 브루크 OECD 선임경제학자는 AI가 곧바로 대규모 일자리 소멸로 이어진다고 보기보다, 직무 내용과 필요 역량이 바뀌는 노동시장 전환에 주목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OECD 연구를 근거로 AI가 향후 10년간 연간 노동생산성 증가율을 0.4~0.9%포인트 끌어올릴 잠재력이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직업별 AI 노출도에 따라 영향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고 봤다.
AI가 기존 업무의 일부를 수행하거나 보조할 수 있게 되면서 데이터 해석, 문제 해결, 창의성 등 AI를 보완하는 역량의 중요성은 더 커질 것으로 전망됐다. AI 도입이 생산성 향상과 고용의 질 개선으로 이어지려면 근로자 대상 AI 교육훈련을 확대하고, 중소기업과 취약계층까지 포함하는 전환 지원책이 필요하다는 제언도 나왔다.
이철희 서울대 교수는 AI 확산만으로 장래 인력수급 불균형을 해결하기 어렵다고 봤다. AI 노출도는 금융, 법률 등 고임금·고숙련 부문에서 높게 나타나는 반면, 앞으로 인력 부족이 예상되는 돌봄, 운송, 음식점 등은 AI 대체가 쉽지 않은 저임금·저숙련 부문이라는 이유에서다.
이 교수는 AI 확산으로 청년층이 전문성을 쌓을 수 있는 초급 일자리가 줄어들 수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이에 따라 정부가 기업의 채용과 교육훈련 비용 일부를 지원해 청년의 ‘숙련 사다리’를 복원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인력 부족이 예상되는 저숙련·저임금 부문에 대해서는 별도 접근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민간의 AI 기술 개발 유인이 상대적으로 약한 만큼, 정부가 해당 분야 기술 개발과 상용화를 지원해 인력수급 불균형을 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세션에서는 AI를 인력 대체 수단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기존 인력의 생산성을 높이는 보완 기술로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시됐다.
길은선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AI가 확산될수록 업무 내 비효율을 찾아내고 이를 업무 프로세스 혁신으로 연결하는 경영 능력이 기업 성과를 가를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은 AI 활용의 우선순위를 생산과정의 병목, 반복 업무, 오류, 안전 위험을 줄이는 데 둬야 한다고 설명했다.
길 연구위원은 위험하거나 신체 부담이 큰 작업은 기술이 맡고, 사람은 판단과 조정, 예외 처리 등 고부가가치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직무 구조를 다시 설계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정부도 근로자를 보완하고 안전 개선, 고용 유지, 생산성 향상과 연결되는 고용 친화적 AI 도입을 우선 지원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르네이 탄 싱가포르 평생학습연구소 부원장은 싱가포르의 SkillsFuture 사례를 소개하며 AI 시대에는 교육훈련을 넘어 일과 학습을 연결한 역량 중심 전환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SkillsFuture는 25세 이상 싱가포르 시민에게 교육과정 수강 크레딧을 지급해 개인 주도 학습을 장려하는 제도다. 탄 부원장은 AI 시대에는 이 제도가 단순한 학습 기회 제공을 넘어, 기업이 직무 역량 변화를 예측하고 근로자의 부족한 역량을 보완해 새 직무로 재배치하는 인력 전환 전략으로 확장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기업 경쟁력이 기술 도입 여부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고 봤다. 신기술 도입과 사업 확장 전략에 맞춰 근로자 역량을 개발하고 활용하는 인재 전략을 함께 추진하는 기업이 더 높은 성과를 낸다는 것이다.
패널토론에서는 AI 확산에 대응하기 위해 창업 지원과 재숙련 정책을 함께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정철 한경협 연구총괄대표 겸 한국경제연구원장은 AI 확산은 일자리의 양만 줄이는 문제가 아니라 기업이 필요로 하는 직무와 근로자 역량 자체를 바꾸는 구조적 변화라고 말했다.
노민선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실장은 중소기업에 AI가 본격 도입되면 고도화된 직무 수요만 남아 일자리 수요가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반면 AI 기반 1인 창업은 늘어날 수 있어 청년의 AI 활용 역량을 높이는 창업 지원 정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유진성 한국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AI 시대 고용안정 과제를 숙련도 향상과 재숙련 강화로 압축했다. 정부 고용서비스 시스템을 활용해 근로자의 직무 경험과 역량을 분석하고, 기존 역량과 연관성이 높으면서 향후 인력 수요가 큰 직종으로 이동할 수 있는 경로를 제시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이날 논의의 결론은 AI 전환을 단순한 대체 위협으로 볼 것이 아니라, 인력 전환 관리의 문제로 다뤄야 한다는 데 모였다. AI가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는 기대는 크지만, 그 효과가 고용 안정으로 이어지려면 교육훈련과 직무 재설계, 산업별 맞춤 지원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