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는 살아 있는가.
어쩌면 이 질문은 잘못되어 있다.
우리는 살아 있다는 말을 너무 쉽게 생물에게만 허락하기 때문이다. 숨 쉬고, 성장하고, 늙고, 죽는 것만을 생명이라고 부른다면 문자는 살아 있지 않다.
그러나 문화의 시간은 생물학의 시간과 다르다.
문자는 이동한다.
형태를 바꾼다.
다른 매체에 적응한다.
때로는 사라지고, 때로는 수천 년을 건너 전혀 다른 시대의 인간에게 다시 발견된다.
돌에서 종이로, 종이에서 활자로, 활자에서 화면으로. 그리고 이제 문자는 인간의 손을 떠나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의 데이터 속에서도 생성되고 있다.
그렇다면 문자의 생명이란 지속되는 형태가 아니라 변형될 수 있는 능력인지도 모른다.
금보성비엔날레의 한글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한다.
한글을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한글을 다시 불안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완성된 문자에 다시 균열을 낸다는 것
한글은 이미 완성된 문자체계다.
그러나 예술은 완성된 것 앞에서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예술은 완성되었다고 믿는 것에 질문을 던진다.
정말 끝났는가.
금보성은 새로운 문자를 발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가 선택하는 것은 더 역설적인 방법이다.
이미 존재하는 문자 안으로 들어가 그 질서를 흔드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는 그것을 읽을 수 없게 된다.
바로 그때 회화가 시작된다.
금보성의 작업에서 문자가 회화가 되는 순간은 무엇인가가 더해지는 순간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기능이 멈추는 순간이다.
읽기가 멈출 때, 보기가 시작된다.
-읽을 수 없다는 것은 실패인가
금보성의 작품 앞에서 한국 관객이 경험하는 최초의 감정은 어쩌면 당혹감일 것이다.
한글이라는 사실은 알지만 읽을 수 없다.
그러나 이 불편함이야말로 그의 작업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다.
우리는 문자를 너무 오랫동안 의미를 전달하는 도구로만 사용해왔다. 글자를 보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읽는다.
보기도 전에 읽는다.
금보성은 그 자동적인 반응에 작은 장애물을 놓는다.
읽으려는 눈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ㄱ에서 발음이 사라지자 각도가 보인다.
ㅁ에서 의미가 사라지자 내부와 외부가 생긴다.
ㅇ에서 음가가 사라지자 원과 반복과 운동이 나타난다.
문자가 없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자 속에 감춰져 있던 다른 존재가 드러난 것이다.
따라서 금보성의 한글회화에서 ‘읽을 수 없음’은 결핍이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시각성을 얻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다.
-해체가 아니라 해제
여기에서 금보성의 중요한 개념 하나가 등장한다.
해제.
해체와 해제는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방향을 가진다.
해체가 하나의 구조를 분해하는 것이라면, 해제는 그 구조에 부여되어 있던 의무를 풀어주는 일이다.
금보성은 한글을 파괴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글에게 지나치게 오랫동안 부여되어 있던 하나의 명령을 잠시 거둬들인다.
너는 읽혀야 한다.
그 명령이 사라지는 순간 문자는 자유로워진다.
ㄱ은 문이 될 수도 있고, 꺾인 선이 될 수도 있으며, 공간을 나누는 경계가 될 수도 있다.
ㅁ은 음가가 아니라 방이 될 수 있다
이것이 금보성이 말하는 해제의 미학적 가능성이다.
문자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문자에게 아직 살아보지 못한 다른 삶을 허락하는 것.
-균열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금보성의 화면에는 균열이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균열을 손상으로 이해한다.
벽에 균열이 생기면 보수하고, 도자기에 금이 가면 결함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예술에서 균열은 다른 의미를 갖는다.
균열은 완전한 표면이 더 이상 완전하지 않다는 증거이며 동시에 내부와 외부가 만나는 최초의 통로다.
씨앗을 생각해보라.
껍질이 끝까지 완전하다면 싹은 나오지 못한다.
생명은 역설적으로 파열에서 시작된다.
금보성의 크랙 역시 이와 비슷하다.
균열은 화면을 파괴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완결된 표면을 미완성으로 되돌린다.
그 틈으로 시간이 들어온다.
색이 들어오고, 우연이 들어오고, 물질이 들어오며 관객의 시선이 들어온다.
따라서 금보성의 균열은 파괴의 흔적이라기보다 생성이 들어올 수 있도록 남겨둔 문에 가깝다.
완벽하게 닫힌 것은 더 이상 변화하지 않는다.
그리고 변화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이미 죽은 것이다.
-한글 생명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금보성의 작업을 이해하면서 ‘생명’을 지나치게 낭만적인 은유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한글이 실제 생물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여기서 생명은 변형의 능력을 의미한다.
문자는 획이 되고,
획은 선이 되고,
선은 면을 만들고,
면은 색과 충돌하며,
회화는 벽을 넘어 공간으로 이동한다.
마침내 관객은 한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간다.
이 이동에서 중요한 것은 어느 단계도 최종 형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금보성에게 한글은 완성된 대상이 아니라 계속 다른 상태로 이동하는 구조다.
그러므로 ‘한글 생명’이라는 말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에 가까워야 한다.
한글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되어가고 있는가.
그 질문 속에서 비로소 그의 회화가 열린다.
-파종 : 작가는 의미를 소유할 수 있는가
금보성의 또 하나의 개념인 ‘파종’은 이 지점에서 중요해진다.
파종은 단순히 씨앗을 뿌리는 행위가 아니다.
미학적으로 파종한다는 것은 결과를 통제하지 않는 것이다.
씨앗을 뿌린 사람은 꽃의 모든 방향을 결정할 수 없다.
토양과 온도와 바람과 계절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작품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작품을 만들 수 있지만 그 작품에서 발생하는 모든 의미까지 소유할 수는 없다.
한국인은 금보성의 화면에서 한글의 흔적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한글을 모르는 관객에게 그것은 전혀 다른 것이 될 수 있다.
기하학일 수도 있고, 건축적 구조일 수도 있으며, 색채의 리듬이나 추상의 운동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어느 해석이 옳은가.
아마 질문 자체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파종의 미학에서 중요한 것은 동일한 의미의 반복이 아니라 서로 다른 해석의 발생이기 때문이다.
-문화유산을 살아 있게 한다는 것
우리는 문화유산을 보존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보존만으로 문화가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박물관의 유리 안에서 완벽하게 보존된 것은 오래 지속될 수 있다. 하지만 살아 있는 문화는 보존되는 것만큼이나 변형되고 오해되고 재해석되며 새로운 세대에 의해 다시 사용된다.
한글 역시 마찬가지다.
21세기에 필요한 질문은 한글이 얼마나 위대한 문자인가를 반복하는 데 있지 않다.
더 어려운 질문은 이것이다.
그 위대한 문자로 우리는 아직 무엇을 만들지 못했는가.
금보성비엔날레가 의미를 얻는다면 바로 이 질문 때문이다.
한글을 과거의 위대한 발명으로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미완성 가능성으로 돌려놓으려 하기 때문이다.
사진제공=송림아트센터
-계승한다는 것은 닮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금보성의 작업 역시 비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오히려 ‘한글 생명’을 주장한다면 그의 작업 자체도 언젠가는 넘어야 할 대상이 되어야 한다.
다음 세대의 작가들이 금보성의 색과 구성과 자음 해제 방식을 그대로 반복한다면 그것은 계승이 아니다.
복제에 가깝다.
진정한 계승은 닮음의 지속이 아니라 차이의 발생이다.
다음 세대는 한글을 빛으로 만들 수도 있다.
소리로 해체할 수도 있으며, 건축과 영상, 신체, 가상공간, 인공지능 속에서 전혀 다른 문자 경험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심지어 금보성의 한글미학을 부정하는 작가가 등장해야 한다.
그 부정조차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살아 있는 미학이기 때문이다.
스승을 반복하는 것이 계승이 아니라, 스승이 열어놓은 문을 지나 전혀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계승이다.
-비엔날레는 작품의 집합이 아니라 질문의 생태계다
따라서 금보성비엔날레의 미래는 작품 수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이곳에서 시작된 질문이 얼마나 멀리 이동할 수 있는가이다.
작가에게서 관객으로,
관객에게서 연구자로,
연구자에게서 다른 작가로,
그리고 다시 다음 세대로.
그 과정에서 질문은 변형되어야 한다.
금보성의 질문이 그대로 반복된다면 비엔날레는 기념행사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질문에서 수십 개의 다른 질문이 태어난다면 비엔날레는 하나의 문화적 생태계가 된다.
생명은 중심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에서 멀어지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문자는 살아 있는가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문자는 살아 있는가.
금보성비엔날레는 이에 대해 쉽게 “그렇다”고 대답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질문을 우리에게 되돌려야 한다.
우리는 문자를 살아 있게 하고 있는가.
읽고 있는가.
보존하고 있는가.
소비하고 있는가.
아니면 다시 태어나게 하고 있는가.
금보성의 작업이 흥미로운 것은 완성된 한글에 또 하나의 완성된 형태를 더하려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반대로 완성되었다고 믿었던 문자를 다시 미완성으로 돌려놓는다.
문자는 획으로 돌아가고, 획은 선이 되고, 선은 색과 면으로 이동한다. 회화는 공간으로 확장되고, 공간은 관객의 몸과 만나 또 다른 경험이 된다.
그 순간 한글은 하나의 답에서 벗어난다.
다시 질문이 된다.
-결론: 살아 있는 문자는 완성되지 않는다
금보성비엔날레가 궁극적으로 증명해야 할 것은 한글이 위대한 문자라는 사실이 아니다.
그 사실은 이미 충분히 말해졌다.
더 중요한 것은 한글이 아직 끝나지 않은 문자라는 사실을 예술로 보여주는 것이다.
문자의 진정한 죽음은 사람들이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순간에만 오는 것이 아닐 것이다.
아무도 그것을 다르게 상상하지 않는 순간에도 문자는 죽기 시작한다.
반대로 누군가 하나의 획을 낯설게 바라보고, 익숙한 자음을 흔들고, 문자에 작은 균열을 만들며 그 틈에서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이미지를 발견한다면 문자는 다시 태어난다.
그런 의미에서 금보성의 작업은 한글을 완성하려는 예술이 아니다.
한글을 다시 미완성으로 만드는 예술이다.
그리고 언젠가 금보성이라는 이름조차 모르는 한 작가가 그의 방식과 전혀 다른 방법으로 한글을 다시 흔들어 깨운다면, 역설적으로 바로 그 순간 금보성의 미학은 가장 멀리 도달한 것이 될 것이다.
예술가가 남길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은 자신의 형식이 아니다.
다른 형식이 태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다.
문자는 살아 있는가.
문자는 스스로 살아 있지 않다.
그러나 한 시대가 다음 시대에게 문자를 완성품이 아니라 아직 열리지 않은 가능성으로 건네줄 때, 문자는 다시 살아난다.
금보성비엔날레가 말하는 ‘한글 생명’의 미학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살아 있는 문자는 보존되는 문자가 아니다.
살아 있는 문자는 계속해서 다르게 태어날 수 있는 문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