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수요 둔화 속 북미 ESS가 새 성장축…LG엔솔·삼성SDI 증설·수주 확대
AI 데이터센터 투자 늘며 대형배터리·동박·알박·MLCC·장비까지 연쇄 수요
탈중국 공급망 재편과 제한된 증설로 일부 소재 수급도 타이트해질 가능성
업계는 판가·가동률·원가 개선이 맞물리는 2027년을 본격 회복 시점으로 주목
[더파워 한승호 기자] 전기차 시장의 성장 둔화로 긴 조정기를 거친 국내 2차전지 산업에 새로운 수요축이 생기고 있다. 전기차에 집중됐던 배터리 수요가 에너지저장장치(ESS)로 빠르게 이동하고,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증설이 대형 배터리부터 동박·알루미늄박·MLCC·장비까지 밸류체인 전반에 새로운 일감을 만들어내는 모습이다.
9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최근 국내 2차전지 관련 기업 12곳과의 사업 현황을 종합한 결과, 전기차 캐즘이 이어지는 가운데 ESS 수요 확대와 AI 데이터센터 투자, 탈중국 공급망 재편이 업황의 새로운 변수로 부상하고 있다. 판가 인상과 가동률 회복, 원가 절감이 맞물리는 2027년부터 실적 개선이 보다 뚜렷해질 가능성도 거론된다.
인터배터리 2026'에서 공개된 LG에너지솔루션 LMR배터리.
가장 먼저 움직이는 곳은 배터리 셀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미국에서 ESS 생산 거점을 동시에 가동하며 물량을 빠르게 늘리고 있다. 올해 2분기 미국 5개 사이트에서 생산을 시작했고 3분기 ESS 출하량은 전분기보다 50% 증가할 것으로 예상됐다.
회사는 올해 ESS 신규 수주 목표로 90GWh를 제시한 상태다. 연말 북미 ESS 생산능력은 50GWh 초반까지 확대되고, 테슬라향 각형 ESS 공급 등을 고려하면 2027년 말에는 약 70GWh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올해 ESS 매출도 전년 대비 3배 이상 증가하는 흐름이 전망됐다.
삼성SDI 역시 전기차 배터리 투자 구조를 ESS로 돌릴 여지를 넓히고 있다. 지난 8월 GM과 미국 전기차 배터리 합작 사업을 종료한 데 이어 삼성디스플레이 지분 5%를 매각해 약 4조4500억원의 현금을 확보하기로 했다.
미국 내 단독 생산거점과 투자 재원을 동시에 확보하면서 북미 ESS와 LFP 생산라인 증설 가능성이 커졌다는 분석이다. 금융투자업계는 삼성SDI의 ESS 생산능력이 2025년 21GWh에서 올해 29GWh, 2027년 43GWh 수준까지 확대될 가능성을 보고 있다.
변화는 배터리 셀에서 끝나지 않는다. AI 데이터센터가 대규모 전력을 소비하면서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위한 ESS 설치가 늘고, 서버에 들어가는 백업배터리유닛(BBU)과 전자부품 수요까지 동시에 증가하는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다.
대주전자재료는 AI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에 따른 GPU 고도화가 MLCC와 인덕터 수요를 끌어올리고, 다시 전도성 페이스트 수요로 이어지는 흐름을 보고 있다. 주요 고객사의 증설 계획을 감안하면 2028년 이후 MLCC용 페이스트 수요가 현재 생산능력의 2배 수준까지 확대될 수 있어 단기적으로 생산능력을 50% 늘리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에서는 AI 서버와 반도체용 회로박이 새로운 성장축으로 떠올랐다. 오랫동안 연간 약 6000톤 수준에 머물던 관련 시장이 AI 가속기와 네트워크용 기판 수요 증가로 빠르게 커지면서 회사는 회로박 생산능력을 2025년 3000톤 중반에서 올해 6700톤, 2027년 1만6000톤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전기차용 전지박도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지난 2~3년 동안 업계 증설이 제한되고 일부 생산라인이 회로박으로 전환되면서 북미에서는 비중국산 전지박 공급이 빠듯해지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ESS 수요 자체보다 제한된 공급이 향후 가격 협상력을 높이는 핵심 요인으로 지목된다.
SKC도 비슷한 변화를 겪고 있다. 전기차 캐즘으로 동박 공급과잉과 가격 하락에 시달렸지만 ESS 수요가 늘고 신규 증설은 제한되면서 경쟁 환경이 개선되고 있다. 회사는 올해 하반기 가공비 인상과 2027년 말레이시아 생산라인 가동률 개선이 맞물리면서 실적 회복이 본격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알루미늄박도 ESS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삼아알미늄은 올해 2분기부터 주요 고객사의 북미 ESS 출하 확대 효과를 받기 시작했으며, 현재 생산능력이 연말이면 사실상 최대 수준에 근접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중장기적으로 나트륨이온 배터리가 상용화될 경우 삼원계 배터리보다 알루미늄박 투입량이 약 2배 많다는 점도 추가 수요 요인이다.
배터리 장비업체들도 전기차 신규공장 대신 ESS 전환 투자에서 일감을 찾고 있다. 필에너지는 최근 ESS용 각형 배터리 제조설비 약 700억원을 수주했으며, 고객사의 미국 전기차 라인을 ESS로 개조하는 작업이 추가로 이어질 가능성을 보고 있다. 회사가 추산하는 추가 라인 개조 규모는 라인당 약 800억원이다.
피엔티 역시 전기차 캐즘에도 올해 상반기 말 기준 약 1조5000억원의 수주잔고를 유지하고 있다. 국내 배터리 3사의 LFP 설비 투자뿐 아니라 중국 배터리 업체들이 말레이시아·헝가리 등으로 생산거점을 옮기면서 기존 중국 공장에 공급했던 장비가 해외 생산기지까지 따라가는 사례가 늘고 있다.
ESS 확대가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생산량을 빠르게 늘리는 과정에서 추가 운전자금과 설비자금이 필요할 수 있고, 올해 3분기 실적 시즌에 단기적인 손익 부담이 다시 부각될 가능성도 있다. 전기차 수요 회복 속도가 아직 뚜렷하지 않다는 점도 변수다.
실제 올해 7월 글로벌 전기차와 플러그인하이브리드 판매는 188만대로 전년보다 10% 증가했지만 지역별 온도 차는 컸다. 중국을 제외한 시장은 29% 성장한 반면 미국은 39% 감소했고, 유럽은 30%, 인도는 30%, 한국은 44% 증가했다. 전기차 시장 전체가 동시에 회복하는 국면과는 거리가 있다는 의미다.
때문에 국내 업체들은 ESS에서 확보한 시간을 차세대 배터리 준비에 활용하고 있다. 레이크머티리얼즈는 황화물계 전고체 배터리 소재를 한국·미국·일본·중국·유럽의 10개 이상 업체와 평가하고 있으며 중장기적으로 최대 6000톤의 생산능력을 확보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성일하이텍 군산 새만금 공장 전경
성일하이텍은 LFP 폐배터리 재활용을 준비하고 있다. 연간 4000톤 규모의 처리라인을 구축해 올해 말 상업화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이후 생산능력을 2배 수준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한다. 전기차와 ESS에서 LFP 사용량이 늘어날수록 폐배터리 처리 시장도 함께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2차전지 산업의 회복 공식은 과거와 달라지고 있다. 전기차 판매량이 다시 폭발적으로 늘기를 기다리는 대신 ESS가 공장 가동률을 채우고, AI 데이터센터가 배터리와 전자부품 수요를 추가하며, 탈중국 공급망 재편이 국내 소재기업에 새로운 공급 기회를 만들어주는 구조다.
관건은 이 수요가 실제 수주와 가동률, 가격 인상으로 얼마나 빠르게 연결되느냐다. 업계가 2027년을 주목하는 것도 ESS 물량 확대와 일부 소재의 공급 부족, 생산효율 개선이 동시에 실적에 반영될 가능성이 커지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EV 캐즘을 지나고 있는 K배터리의 다음 사이클이 전기차 한 축이 아니라 ESS·AI·공급망 재편이라는 세 축에서 시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