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파워 한승호 기자] 국내 인쇄용지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제지업체들이 3년 10개월 동안 판매가격 인상을 담합한 사실이 적발됐다.
23일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무림에스피, 무림페이퍼, 무림피앤피, 한국제지, 한솔제지, 홍원제지 등 6개 인쇄용지 제조·판매업체는 2021년 2월부터 2024년 12월까지 인쇄용지 전 제품의 가격 인상을 합의하고 이를 실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공정위는 이들 업체에 향후 법 위반 행위 금지명령과 독자적 가격 재결정 명령 등 시정명령을 내리고, 총 3383억25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기로 했다. 한국제지와 홍원제지 2개 법인은 검찰에 고발하기로 결정했다.
공정위에 따르면 인쇄용지는 교과서와 단행본, 잡지, 화보 등 각종 인쇄물의 핵심 원재료다. 이 때문에 제지업체들의 가격 담합은 인쇄업체와 출판사의 제작비 부담을 키우고, 결국 소비자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공정위는 판단했다.
이니셜, 가명을 사용하여 별도의 종이에 작성된 경쟁사 연락처
특히 이들 업체가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국민경제 전반이 어려움을 겪던 시기에 원가 상승 부담을 거래 상대방에게 전가하고 부당이득을 극대화하기 위해 담합에 나선 점을 문제 삼았다.
조사 결과 6개 제지사는 2021년 2월부터 2024년 12월까지 정기·비정기적으로 최소 60차례 넘는 회합을 가지며 모두 7차례에 걸쳐 가격 인상을 합의했다. 이들은 기준가격을 직접 올리는 방식 2차례와 할인율을 축소하는 방식 5차례를 병행해 판매가격 인상을 추진했다. 인쇄용지 판매가격은 각 제지사가 제시하는 품목별 기준가격에 할인율을 반영해 결정되는데, 할인율을 줄이면 실질 판매가격이 올라가는 구조다.
실제 합의 내용을 보면 1차는 2021년 3월부터 할인율을 15%포인트 줄이는 방식으로 이뤄졌고, 2차는 같은 해 6월부터 할인율 7%포인트 축소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어 2021년 12월에는 기준가격을 7% 인상했고, 2022년 5월에는 기준가격을 다시 15% 올렸다.
이후 2022년 9월 할인율 7%포인트 축소, 2023년 12월 할인율 8%포인트 축소, 2024년 8월 할인율 7%포인트 축소까지 이어졌다. 공정위는 이들 업체가 총 7차례의 합의를 한 번도 실패 없이 그대로 실행했다고 설명했다.
담합의 은밀성도 두드러졌다. 공정위에 따르면 담합을 주도한 제지사 임직원들은 적발을 피하기 위해 본인 명의의 휴대전화를 쓰지 않고 근처 공중전화와 식당 전화, 다른 부서 직원의 휴대전화 등을 이용해 연락했다.
경쟁사 연락처도 휴대전화에 저장하지 않고 별도 종이에 이니셜이나 가명으로 적어 관리했다. 거래처에 가격 인상을 먼저 통보한 업체가 반발을 더 크게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참여 업체끼리 통보 순서까지 사전에 정했고, 이견이 생길 경우 동전이나 주사위를 던져 순서를 정한 사례도 있었다.
공정위는 이번 담합이 시장에 미친 영향도 상당하다고 봤다. 국내 인쇄용지 판매시장에서 이들 6개 업체의 점유율은 95%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들 업체가 담합을 이어간 기간 동안 인쇄용지 판매가격은 평균 71% 상승했다.
그 결과 업체들은 안정적인 영업이익을 확보했지만, 그 부담은 중간 유통사를 거쳐 최종 소비자에게 전가됐다고 공정위는 설명했다. 일부 기간에 할인율이 확대돼 판매가격이 내려가는 경우에도 다시 합의해 할인율을 줄이는 방식으로 인상 효과를 유지한 것으로 조사됐다.
공정위는 이번 사건의 배경으로 인쇄용지 수요 감소와 원가 상승을 함께 지목했다. 디지털 전환 확산으로 인쇄용지 수요가 계속 줄어드는 상황에서 일부 제지사가 공격적으로 물량을 확보하면서 업체 간 가격 경쟁이 심화됐고, 2020년 이후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전쟁, 환율 상승 등으로 제조원가까지 오르자 사업자들이 경쟁을 피하고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가격 담합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제재 수위도 상당하다. 공정위에 따르면 이번 과징금 3383억2500만원은 공정위가 담합 사건에 부과한 과징금 가운데 다섯 번째로 큰 규모다. 제지업체 담합 사건 기준으로는 최대 금액이다.
공정위는 인쇄용지 제조에 대규모 설비투자가 필요해 신규 사업자 진입이 쉽지 않고, 6개 업체가 과거에도 반복적으로 법 위반을 저지르는 등 담합 행위가 업계 관행처럼 고착화된 점을 고려해 단순한 과징금 부과를 넘어 경쟁 회복을 위한 적극적 조치를 내렸다고 설명했다.
그 일환으로 공정위는 각 제지사가 국내에서 판매하는 인쇄용지 관련 제품 가격을 담합 이전의 경쟁이 회복되는 수준으로 독자적으로 다시 정하도록 명령했다. 특히 마지막 7차 합의 이후 전체 거래처를 대상으로 한 기준가격이 아직 변경되지 않아 담합의 영향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보고, 향후 3년 동안 반기마다 가격 변경 내역을 보고하도록 했다.
공정위는 이런 독자적 가격 재결정 명령이 2006년 4월 밀가루 담합 사건 이후 두 번째 사례라고 설명했다.
공정위는 이번 조치가 인쇄용지 시장에서 오랫동안 은밀하게 지속돼 온 대형 제지사들의 가격 담합을 바로잡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특히 최근 중동 전쟁 충격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인쇄업체와 출판업계, 중소 유통업체의 부담을 낮추고, 교육비와 도서구입비 같은 생활비 상승을 유발할 수 있는 담합 가능성을 차단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보고 있다.
공정위 관계자는 "앞으로도 국민 생활과 밀접한 분야의 담합행위에 대한 감시를 계속 강화할 방침"이라며 "담합은 공정한 경쟁 질서를 해치고 다양한 경제 주체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불공정행위인 만큼, 위법이 확인되면 예외 없이 엄정하게 조치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이어 "밀가루와 전분당, 계란 등 식료품 분야 담합 사건에 대한 심의도 신속히 진행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