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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M만 믿다간 늦는다…한국 제조업 ‘대체불가 카드’는 현장 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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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M만 믿다간 늦는다…한국 제조업 ‘대체불가 카드’는 현장 데이터

이경호 기자

기사입력 : 2026-08-06 09:00

반도체·제철·조선의 조업 판단과 암묵지를 한국형 제조 LLM으로
기술·생산능력·표준·데이터 결합해 ‘부품 공급자’ 넘어 공동 설계자로

위 사진은 AI(인공지능)를 활용해 생성된 가상의 이미지입니다.
위 사진은 AI(인공지능)를 활용해 생성된 가상의 이미지입니다.
[더파워 이경호 기자] 중국이 반도체 자립과 제조업 AI화를 동시에 밀어붙이는 상황에서 한국이 고대역폭메모리 수요 증가만 바라봐서는 글로벌 생산질서의 주도권을 지키기 어렵다는 경고가 나왔다.

한국 제조업이 수십 년간 축적한 공정 판단과 현장 데이터를 AI 모델로 자산화하고, 이를 반도체·소재·장비와 결합해야 한다는 제안이다.

산업연구원은 미·중 경쟁의 전장이 개별 기술에서 제조 생태계 전체로 이동한 만큼 한국도 공급망을 여러 국가로 분산하는 방어적 정책을 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핵심은 다른 국가가 단기간에 대체할 수 없는 기술과 생산능력, 현장 데이터, 표준을 하나의 산업 체계로 묶는 ‘K-제조 대체불가성’이다.

한국은 HBM과 선단 반도체 공정, 정밀 제조 분야에서 강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단일 제품의 우위는 경쟁사의 증설과 기술 추격으로 약해질 수 있다. 보고서는 HBM의 우위를 차세대 반도체 생태계 전체로 연결하고, 상대적으로 취약한 팹리스와 전자설계자동화, AI 소프트웨어를 함께 육성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보고서가 특히 주목한 자산은 제조 현장의 ‘판단 데이터’다. 반도체 공정에서 장비 상태를 보고 조건을 조정하는 판단, 제철소에서 고로 내부 상황을 해석해 투입량을 바꾸는 경험, 조선소에서 복잡한 건조 순서를 조율하는 노하우는 인터넷에 공개된 문장처럼 수집할 수 없다.

이 같은 데이터는 매뉴얼로 모두 표현되지 않는 작업자의 암묵지와 장기간의 시행착오를 포함한다. 시뮬레이션만으로 동일하게 만들기도 어렵다. 산업연구원은 이 판단 데이터를 학습해 공정의 자율운전을 가능하게 하는 한국형 제조 파운데이션 모델을 ‘제조 LLM’으로 제시했다.

제조 LLM은 단순히 작업 지시를 내리는 생성형 AI가 아니다. 설비의 이상 신호를 해석하고 제품 품질과 생산속도, 에너지 사용량을 동시에 고려해 다음 공정 조건을 판단하는 모델에 가깝다. 자동화가 정해진 동작을 반복하는 것이라면 제조 LLM은 현장의 판단 자체를 기계가 수행하도록 만드는 자율화의 핵심이다.

이 모델을 별도로 만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HBM 등 AI 메모리와 고부가 소재, 정밀 장비·부품, 지능형 제어 소프트웨어를 수직으로 연결해야 한다. 현장 데이터에서 시작해 AI 모델과 반도체, 장비, 제어체계가 하나로 작동할 때 비로소 다른 나라가 쉽게 복제할 수 없는 K-제조 아키텍처가 만들어진다는 설명이다.

정부의 역할도 연구개발비 지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정부가 산업 생태계의 설계자이자 최초 구매자가 돼 공공시설과 산업현장을 제조 LLM의 실증 무대로 개방하고,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기업이 함께 참여하는 컨소시엄을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도체 공장과 제철소, 조선소 등에서 실제 데이터를 활용해 모델을 검증해야 설계 단계의 기술이 산업 자산으로 전환될 수 있다. 개별 기업이 보유한 데이터를 무조건 한곳에 모으는 방식보다는 기업의 영업비밀을 보호하면서 공동 학습과 실증이 가능한 구조를 만드는 것이 과제가 될 전망이다.

전통 제조업도 구조조정 대상으로만 볼 수 없다는 분석이다. 중국이 철강과 석유화학, 기계, 섬유 등 전통산업을 AI와 결합해 전략자산으로 전환하고 있는 만큼 한국도 이들 산업을 피지컬 AI의 학습 원천이자 첫 적용 시장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국의 철강과 석유화학, 조선, 기계산업은 오랜 기간 공정 효율과 품질을 높이며 세계적 수준의 제조기술을 축적했다. 이들 산업의 현장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확보하지 못하면 글로벌 AI 기업이나 중국 제조업체가 먼저 데이터를 표준화해 산업 운영방식을 장악할 수 있다.

피지컬 AI 확산으로 새롭게 생기는 소재·부품 시장도 선점해야 한다. 휴머노이드 로봇에는 가볍고 강한 복합소재와 정밀 액추에이터용 소재가 필요하고, AI 데이터센터에는 초고속·저전력 반도체 기판 소재가 요구된다. 데이터센터와 전력망 확대에 따라 초고압 전력케이블 소재 수요도 늘어날 수 있다.

보고서는 이 같은 수요를 개별 기업이 뒤늦게 따라가는 방식이 아니라 정부의 반도체·AI 데이터센터·로봇 투자계획과 연계해 초기 시장을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전통 소재산업을 피지컬 AI 수요와 연결하면 기존 산업을 지키는 동시에 고부가 시장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통상전략도 바뀌어야 한다. 한국이 보유한 HBM과 배터리 소재, 조선 기술, 정밀 제조능력을 단순 수출품으로만 취급하면 가격과 주문량에 따라 협상력이 흔들릴 수 있다. 기술과 생산능력, 표준, 현장 데이터를 하나의 산업 아키텍처로 결합해 상대국이 한국을 제외하기 어려운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이는 한국이 주요국 공급망에서 부품을 납품하는 역할을 넘어 AI 제조 생태계의 설계 단계부터 참여해야 한다는 의미다. 해외 기업과 공동으로 공장 운영체계를 만들고, 한국의 제조 LLM과 장비·소재를 패키지로 공급하며, 현지 산업에 맞는 작업표준을 함께 설계하는 방식이다.

공급망 블록화는 이미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한국 통상환경의 상수가 됐다. 미국과 중국 가운데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방식만으로는 제조업의 장기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렵다. 모든 주요 교역국이 한국의 기술과 생산능력을 필요로 하도록 만드는 것이 더 현실적인 전략이라는 게 보고서의 결론이다.

산업연구원은 지금을 한국 제조업의 대체불가성을 키울 수 있는 ‘골든타임’으로 규정했다. HBM 호황에 안주하는 동안 중국이 세계 공장의 작업표준을 선점한다면 한국은 기술력이 있어도 이미 만들어진 산업 규칙을 따라야 하는 위치에 놓일 수 있다.

반대로 반도체와 제철, 조선 등에서 축적한 현장 판단을 제조 LLM으로 전환하고 이를 소재·장비·표준과 결합한다면 한국은 글로벌 공급망에서 쉽게 교체할 수 없는 핵심 축이 될 수 있다. K-제조의 다음 승부는 더 많은 제품을 생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공장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일지를 함께 설계하는 데 달렸다는 분석이다.

이경호 더파워 기자 lkh@thepower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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