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월 회사채 발행 58조·만기도래도 58조…순발행은 사실상 ‘0’
금융지주·증권 제외하면 34조 발행·9조 순상환…부족분은 단기조달 9조로 메워
10대 그룹은 17조 발행·27조 상환…대기업 디레버리징이 체감경기 냉각
사모사채 발행 4조→6조…공모 부담 피해 조달방식도 다변화
위 사진은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으로 AI(인공지능)를 활용해 생성된 가상의 이미지입니다.
[더파워 이경호 기자] 올해 회사채 시장은 줄곧 ‘발행 한파’로 불렸다. 금리 부담이 커지고 기업들이 장기채 대신 기업어음(CP)과 전자단기사채로 눈을 돌리면서 공모 회사채 시장이 얼어붙었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하지만 1~7월 실제 발행액은 58조원에 달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줄기는 했지만 과거와 비교해 회사채 발행 자체가 무너졌다고 보기는 어려운 규모다. 체감경기와 통계가 어긋난 이유는 전체 발행액이 아니라 누가 발행했는지를 뜯어보면 드러난다.
3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올해 1~7월 회사채 발행액은 약 58조원, 만기도래액도 약 58조원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같은 기간 발행액 65조원보다는 감소했지만 2024년 57조원, 2023년 50조원과 비교하면 절대 규모는 여전히 적지 않다. 신규 발행과 상환이 맞물리면서 순발행은 사실상 제로 수준을 기록했다.
문제는 금융회사를 빼면 전혀 다른 그림이 나온다는 점이다. 금융지주와 증권사를 제외한 회사채 발행액은 올해 34조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46조원보다 12조원 줄었다. 만기도래액 43조원을 감안하면 9조원을 순상환한 셈이다.
최근 5년 평균 약 6조7000억원을 순발행했던 것과 비교하면 변화 폭은 더 크다. 과거에는 회사채 시장에서 장기자금을 추가로 조달했다면 올해는 오히려 기존 채권을 갚는 쪽으로 방향이 바뀌었다.
사라진 장기조달은 단기시장으로 이동했다. 금융지주와 증권사를 제외한 기업들의 CP·전자단기사채 등 단기자금 잔액은 같은 기간 9조원 증가했다. 회사채에서 9조원을 순상환한 것과 거의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기업들이 필요한 자금 자체를 줄였다기보다 만기를 짧게 가져가는 방식으로 대응했다는 의미다. 금리와 시장 변동성이 큰 상황에서 장기금리를 확정하기보다 단기로 시간을 벌며 향후 발행 여건을 지켜보는 전략이 늘어난 것으로 풀이된다.
시장 분위기를 더 냉랭하게 만든 것은 대기업집단의 움직임이었다. 농협을 제외한 상위 10대 그룹은 올해 1~7월 회사채 17조원을 발행했지만 만기도래액은 27조원에 달했다. 결과적으로 10조원을 순상환했다.
SK그룹은 회사채 2조6950억원을 발행한 반면 만기도래액이 7조1458억원에 달해 4조4508억원을 순상환했다. LG그룹도 1조3711억원, 롯데그룹은 1조3926억원을 각각 순상환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7100억원, 포스코그룹은 5000억원, HD현대그룹은 1조1080억원을 순상환했다. GS그룹과 신세계그룹도 각각 8202억원, 5000억원의 순상환을 기록했다.
반대로 삼성그룹은 4900억원, 한화그룹은 1180억원을 순발행했다. 같은 대기업집단이라도 투자계획과 현금흐름, 계열사별 자금 수요에 따라 조달 방향이 뚜렷하게 갈렸다.
개별 기업에서도 차이는 선명했다. SK이노베이션은 1조67억원의 회사채 만기가 돌아왔지만 신규 발행이 없었고, SK하이닉스 역시 9100억원을 순상환했다. LG화학과 포스코도 각각 7850억원과 6200억원의 회사채를 순상환했다.
반면 신규 투자나 자금수요가 있는 기업들은 적극적으로 시장을 찾았다. 한국남동발전은 1조6700억원을 발행해 1조3800억원을 순발행했고, 한국남부발전은 7800억원, 한국항공우주는 7000억원, 한국서부발전은 6500억원의 순발행을 기록했다.
전체 시장이 닫힌 것이 아니라 필요한 기업은 여전히 장기자금을 조달하고 있었던 셈이다. 올해 회사채 시장의 특징을 단순한 ‘불황’보다 발행 주체의 양극화로 보는 편이 더 정확한 이유다.
조달방식도 변했다. 올해 7월까지 전체 회사채 58조원 가운데 사모사채 발행액은 약 6조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4조원보다 2조원 늘었다.
전체 발행이 감소했는데도 사모채는 오히려 증가했다. 공모채는 기관투자가를 대상으로 수요예측을 거쳐야 하는 만큼 시장 상황이 좋지 않으면 목표한 물량을 채우지 못하거나 예상보다 높은 금리를 부담할 수 있다.
사모채는 투자자를 사전에 확보해 이런 부담을 줄일 수 있다. 기업들이 회사채를 포기했다기보다 공모시장 정면승부를 피하면서 조달 경로를 다변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책금융이 회사채 시장을 대체하고 있다는 시각도 아직 숫자로는 뚜렷하지 않다. 국민성장펀드는 반도체와 AI, 이차전지, 바이오 등 전략산업을 중심으로 저리 자금을 공급하고 있지만 기존 회사채 발행기업의 장기조달을 대규모로 대체한 사례는 제한적인 것으로 분석됐다.
올해 승인된 사업에는 삼성전자의 평택 P5 AI반도체 클러스터와 네이버 AI 데이터센터, LG디스플레이 OLED 투자, SK바이오사이언스 백신사업, LG에너지솔루션 차세대 배터리 마더팩토리 등이 포함됐다. 9월 1일까지 승인된 19건의 국민성장펀드 지원 규모는 총 6조5915억원이다.
이 가운데 기존 공모 무보증 회사채 잔액을 보유한 기업들을 기준으로 보면 초저리 정책대출이 회사채 발행을 직접 대체한 뚜렷한 사례는 현재까지 네이버 정도로 파악됐다. 정책자금 확대만으로 올해 대기업의 회사채 발행 감소를 설명하기는 어렵다는 의미다.
신용등급별로 봐도 장기조달에 대한 기업들의 보수적인 태도가 드러난다. 금융지주와 증권사를 제외하면 AAA등급을 뺀 대부분 신용등급에서 회사채가 순상환을 기록했다.
반면 전체 시장에서는 증권사가 다수 포함된 AA+와 AA0 등급을 중심으로 단기자금 조달이 크게 늘었다. 증권사와 금융회사가 장·단기 조달을 확대하면서 전체 회사채 발행 통계를 떠받친 반면 일반 기업은 부채를 줄이거나 단기물로 이동한 것이다.
결국 58조원이라는 전체 발행액만 보면 올해 회사채 시장은 생각보다 평온해 보인다. 하지만 내부에서는 금융회사와 일반 기업, 대기업과 투자 확대 기업, 공모채와 사모채 사이에서 자금조달 방향이 뚜렷하게 갈라졌다.
특히 대기업들이 10조원 규모의 회사채를 순상환했다는 점은 시장의 체감온도가 낮았던 이유를 설명한다. 평소 대규모 발행으로 시장 분위기를 이끌던 기업집단이 신규 채권을 적극적으로 찍지 않으면서 투자자 입장에서는 실제 총발행액보다 발행시장이 훨씬 조용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확인할 지점도 전체 회사채 발행액 하나가 아니다. 단기시장으로 이동한 기업들이 다시 장기채로 돌아오는지, 순상환에 나섰던 대기업이 신규 투자와 함께 발행을 재개하는지, 늘어난 사모채 비중이 다시 공모채로 이동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올해 회사채 시장은 ‘기업들이 돈을 빌리지 않았다’기보다 ‘누구는 갚았고 누구는 빌렸으며, 빌리는 방식도 달라졌다’는 데 가깝다. 58조원의 숫자 뒤에서 진행된 이 조달구조 변화가 향후 금리와 투자 사이클이 바뀔 때 회사채 시장의 다음 방향을 결정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