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격 상승률 둔화·AI 투자 부담·중국 D램 부상에 반도체 주가 흔들
서버 고객은 3~5년 LTA 확대…선급금·가격 하한선으로 수요 가시성 높여
신규 공장 생산기여 2028년부터 본격화…2027년 공급부족 오히려 심화 전망
HBM은 2027년 가격·2028년 물량 성장…삼성·SK하이닉스 주주환원도 확대
/연합뉴스
[더파워 이경호 기자] 반도체 시장에 이상한 괴리가 나타나고 있다. 주가는 인공지능(AI) 투자 피크아웃과 메모리 가격 상승률 둔화, 중국 반도체의 추격을 걱정하고 있지만 실제 메모리 수급은 오히려 더 빡빡해질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과거 메모리 사이클에서는 가격 상승률이 정점을 통과하면 이익 증가 속도가 둔화되고 주가도 먼저 고점을 찍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고객과 공급업체 사이에 3~5년짜리 장기공급계약(LTA)이 확산되고 신규 공장의 실질적인 생산 기여도 늦어지면서 과거와 같은 급격한 다운사이클이 나타나기 어려운 구조로 바뀌고 있다는 분석이다.
2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글로벌 메모리반도체 시장은 지난해 2201억달러에서 올해 9270억달러, 2027년 1조4301억달러까지 확대될 것으로 전망됐다. 삼성전자 메모리사업과 SK하이닉스를 합친 영업이익 역시 지난해 79조원에서 올해 639조원, 2027년 967조원까지 늘어날 수 있다는 추정이 제시됐다.
시장이 이 숫자를 그대로 믿지 못하는 이유도 분명하다. 첫 번째는 AI 설비투자다.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 메타, 아마존 등 북미 하이퍼스케일러가 경쟁적으로 데이터센터 투자를 늘리면서 일부에서는 올해 3분기 이후 자본적지출(Capex)이 EBITDA를 넘어설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대규모 투자를 이어가는 과정에서 잉여현금흐름(FCF)이 줄고 자금조달 방식도 현금에서 부채로 이동하고 있다. 금리가 높은 상황에서 차입까지 늘어난다면 빅테크가 결국 AI 투자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 시장이 제기하는 대표적인 피크아웃 논리다.
하지만 실제 구매 행동은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분석이다. 주요 하이퍼스케일러들이 복수의 메모리 업체와 동시에 다년간 LTA를 체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메모리 장기계약은 통상 3년 이상, 길게는 5년 수준으로 체결되는 것으로 파악됐다. 계약 규모의 10~30%가량을 선급금 형태로 지급하는 사례도 있으며 최근에는 20~30% 수준까지 높아진 것으로 추정됐다.
AI 투자를 적극적으로 줄일 계획이라면 고객 입장에서 굳이 수년 뒤 물량까지 약속하고 선급금까지 지급할 이유가 크지 않다. 장기계약 확대 자체가 현재 공개된 투자계획보다 장기간 메모리 수요가 유지될 가능성을 보여주는 신호로 해석되는 이유다.
가격 구조도 과거와 달라졌다. 메모리 가격은 여전히 분기별로 협상하지만 상당수 장기계약에 가격 상한과 하한을 설정하거나 일정 가격을 고정하는 장치가 포함된 것으로 분석됐다.
일부 계약은 올해 2분기 가격을 기준선으로 삼고 있다. 특히 가격 하한선까지 떨어지더라도 메모리 업체가 60% 이상의 매출총이익률을 확보할 수 있는 수준으로 계약이 설정됐다는 추정도 나왔다.
이 구조가 정착되면 가격이 급락할 때마다 이익이 적자로 돌아섰던 전통적인 메모리 사이클의 변동폭이 작아질 수 있다. 고객 입장에서는 필요한 물량을 확보하고 공급업체는 최소한의 수익성을 보장받는 방식이다.
계약 연장 옵션도 변수다. 일부 LTA에서는 계약 종료 시점보다 훨씬 앞서 다음 계약을 연장할지를 결정하는 조건이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공급업체 입장에서는 수년 뒤 실제 수요를 미리 파악해 생산능력을 조절할 수 있다는 의미다.
공급 측면에서도 당장 물량이 크게 늘어나기 어렵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모두 신규 생산시설을 건설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생산 기여는 2028년 이후에 본격화될 가능성이 높다.
삼성전자의 평택 4공장은 공격적으로 생산능력을 늘리고 있지만 완전한 생산능력을 확보하는 시점은 2027년 상반기 말로 예상됐다. 평택 5공장 첫 번째 팹도 완공 시점이 2027년 7월로 추정돼 실제 웨이퍼 생산은 2028년 1분기 말부터 가능할 것으로 전망됐다.
SK하이닉스도 용인 1기 공장 완공 시점을 2027년 2월로 앞당길 계획이지만 2027년에 실제 생산에 기여할 수 있는 물량은 월 2만장 안팎으로 제한될 것으로 예상됐다. NAND 전용 M17은 2028년부터 건설을 시작해 2030년 이후에야 본격적인 생산 기여가 가능할 전망이다.
수요는 빠르게 늘어나는데 대규모 신규 공장의 공급은 2028년 이후에 붙는다면 2027년에는 오히려 공급부족이 심해질 가능성이 있다. 메모리 가격 상승률이 둔화하더라도 가격 자체가 쉽게 하락세로 전환되지 않을 수 있다는 논리다.
HBM도 다시 성장의 중심에 놓이고 있다. 금융투자업계에서는 2027년 HBM 시장 규모가 전년보다 185% 증가한 160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2027년 HBM 출하량은 574억Gb로 전년 대비 57% 증가할 것으로 예상됐다. TSMC의 CoWoS 생산능력 확대와 수율 개선이 AI 가속기 생산량을 끌어올리면서 HBM 실수요 증가로 연결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2027년은 가격이 성장을 주도하고 2028년부터는 물량이 성장의 중심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있다. 이미 일부 고객은 2028년 HBM 물량을 선제적으로 확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으로 파악됐다.
시장에서는 중국 메모리가 공급부족을 해결할 대안이 될 가능성도 거론한다. 애플을 비롯한 글로벌 세트업체가 공급 부족을 피하기 위해 중국산 메모리 활용을 검토할 수 있다는 우려다.
하지만 실제 공급 능력에는 아직 한계가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중국 CXMT가 아이폰 등에 필요한 LPDDR5X 수준의 성능을 확보하려면 1a급 공정을 적용해야 하지만 관련 생산능력이 제한적이고 전력효율과 장비 확보에서도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는 분석이다.
2026년 말 기준 CXMT의 1a급 최대 생산능력은 월 8만장, 기본적인 예상은 월 6만장 수준으로 추정됐다. 이 가운데 일부 물량은 HBM 개발과 화웨이 공급에도 배정해야 해 중국 내 수요를 충족시키기도 빠듯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산 메모리가 글로벌 시장에 일부 공급되더라도 가격과 수급을 흔들 만큼 대규모 물량이 단기간에 나오기는 어렵다는 판단이다. 미국의 반도체 장비 규제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미세공정에 필요한 장비를 자체적으로 확보해야 한다는 문제도 남아 있다.
AI 투자 자체도 민간기업에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2027년까지 하이퍼스케일러 중심으로 투자가 이어진다면 2028년 이후에는 국가가 직접 AI 인프라를 구축하는 ‘소버린 AI’가 다음 수요원이 될 수 있다는 전망이다.
미·중 AI 패권 경쟁이 기업 차원을 넘어 국가 단위로 확대되면 데이터센터와 가속기, 메모리 투자도 장기화될 수 있다. 현재 시장이 우려하는 AI Capex 피크아웃 시점을 단순히 빅테크의 FCF만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이유다.
메모리 호황의 성격이 바뀌면서 주주환원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삼성전자는 2024~2026년 누적 FCF의 50%를 활용해 올해 약 110조원을 주주에게 돌려줄 가능성이 제시됐다.
3분기 실적 발표 이후 약 30조원의 현금배당을 지급하고 남은 재원은 특별배당과 자사주 매입·소각을 병행하는 방식이 거론된다. 내년에는 새로운 중장기 주주환원 정책 발표도 예상된다.
SK하이닉스 역시 2025~2027년 누적 FCF의 50% 이상을 주주환원에 사용하겠다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장기계약으로 실적 변동성이 낮아지고 현금창출력이 안정될수록 과거보다 연속적인 배당과 자사주 매입·소각이 가능해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결국 지금 반도체 시장의 핵심은 가격 상승률이 정점을 지났느냐가 아니다. 가격이 조금 덜 오르더라도 높은 가격과 수익성이 얼마나 오래 유지될 수 있는지가 중요해지고 있다.
과거에는 고객이 필요할 때 주문하고 메모리 업체가 수요를 예상해 증설했다면 지금은 고객이 수년치 물량을 먼저 약속하고 공급업체가 이를 토대로 생산능력을 배분하는 구조가 확산되고 있다. 메모리 산업을 흔들었던 수요 예측 실패와 과잉증설 위험을 낮출 수 있는 변화다.
AI 투자 부담, 중국 반도체의 추격, 메모리 가격 상승률 둔화는 여전히 확인해야 할 변수다. 그러나 장기계약과 제한적인 신규 공급, HBM 수요 확대가 동시에 이어진다면 이번 메모리 사이클은 과거처럼 가격 급등 뒤 급락하는 짧은 호황보다 높은 수익성이 오래 지속되는 장기 사이클에 가까워질 가능성이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가가 다시 방향을 잡기 위해 필요한 것도 결국 이 변화에 대한 확인이다. 시장이 ‘가격의 정점’보다 ‘이익의 지속기간’을 평가하기 시작하는 순간, 반도체 대형주의 밸류에이션을 바라보는 공식도 다시 달라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