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파워 이경호 기자] 전기차 수요 둔화와 공급과잉 우려에 눌려 있던 2차전지 산업의 반등 논리가 달라지고 있다. 과거 배터리 업황은 전기차 판매량과 거의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지만, 하반기 이후에는 에너지저장장치, 이른바 ESS와 유럽 보급형 전기차, 차세대 배터리 기술이 새로운 변수로 부상하고 있다.
유안타증권은 24일 발간한 ‘2차전지 2H26 Outlook’ 보고서에서 2차전지 섹터에 대해 비중확대 의견을 제시했다. 하반기 실적 우려와 밸류에이션 부담은 상당 부분 주가에 반영됐고, 시장이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미국 BESS 수요 확대와 유럽 EV·ESS 회복, 2027년 기술 모멘텀이 섹터 반등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보고서가 가장 크게 주목한 부분은 미국이다. 다만 미국 전기차 시장 자체를 낙관한 것은 아니다. 미국 EV 수요는 보조금 종료, 높은 자동차 금융비용, 중고 EV 공급 증가 등으로 2027년까지 강한 회복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봤다. 실제 올해 1분기 미국 EV 신차 판매는 약 21만6399대로 전년 대비 27.0% 감소했고, EV 침투율도 2025년 3분기 10.6%에서 5.8%로 낮아졌다.
미국 소비자 입장에서는 전기차 구매 부담이 여전히 크다. 보고서는 올해 5월 기준 미국 평균 신차 대출금리가 9.53% 수준이라고 분석했다. 설령 2027년 대출금리가 7.50%까지 내려가더라도 평균 전기차 가격 5만4532달러 기준 72개월 할부 월 납입금은 997달러에서 943달러로 약 55달러 줄어드는 데 그친다.
반면 세액공제 종료에 따른 부담, 일반 내연기관차 대비 높은 가격, 보험료 할증 등을 고려하면 소비자가 체감하는 전기차 구매 매력은 제한적이라는 설명이다.
고유가도 미국 BEV 신차 수요를 단번에 살리기에는 부족한 요인으로 평가됐다. 유가가 오르면 내연기관차 대비 전기차의 연료비 매력은 커진다. 그러나 미국 시장에서는 충전 인프라 부담이 없고 가격 저항이 낮은 하이브리드,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중고 전기차가 먼저 선택될 가능성이 크다.
보고서는 유가 10달러 상승 시 ICE 신차 수요는 약 3~4% 감소하고 HEV 신차는 5~6% 증가하는 반면, BEV 신차 증가 효과는 0.5~1.5%에 그칠 것으로 추정했다.
전기차가 주춤한 자리를 채우는 축은 ESS다. 보고서는 2026~2028년 미국 ESS 수요가 EV 둔화를 일부 보완하는 수준을 넘어 미국 배터리 셀 가동률을 좌우하는 독립 성장축이 될 수 있다고 봤다. 작년 미국 ESS 신규 설치량은 57.6GWh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고, 올해 1분기에도 9.7GWh가 설치되며 역대 최대 1분기 실적을 냈다.
ESS 수요의 성격도 바뀌고 있다. 과거 ESS는 태양광 발전을 보완하거나 피크 전력 대응, 전력시장 차익거래를 위한 설비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AI 데이터센터가 폭증하면서 전력망 병목, 계통 접속 지연, 냉각 수요, 온사이트 전력 확보가 모두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이 과정에서 BESS는 발전원은 아니지만 피크를 낮추고 전력 품질을 보완하며 데이터센터와 산업 대형 부하의 전력 병목을 완화하는 장치로 쓰임새가 커지고 있다.
미국 신규 발전설비 계획에서도 배터리 저장장치 비중은 빠르게 높아지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미국 신규 유틸리티급 발전설비 40.4GW 중 배터리 저장장치는 6.4GW로 약 16%를 차지했다. 2024년에는 10.4GW로 늘며 비중이 약 21%로 높아졌고, 2025년에는 15GW까지 확대됐다. 2026년에는 24GW가 계획돼 태양광 다음으로 큰 신규 전력 인프라 자산이 될 전망이다.
특히 2026년 배터리 저장장치 계획 증설의 약 80%가 텍사스, 캘리포니아, 애리조나에 집중돼 있다는 점은 의미가 크다. 이들 지역은 전력가격 변동성, 재생에너지 확대, 데이터센터 부하, 송전망 병목이 동시에 나타나는 곳이다. 미국 BESS 수요가 단순한 친환경 설비 확대가 아니라 AI와 전력 인프라 재편의 결과물로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다.
정책 환경도 배터리 공급망의 가치를 바꾸고 있다. 미국 ESS 시장에서는 PFE와 MACR, 45X·48E 세액공제, Section 301 관세, UL 9540A 6판, NFPA 855 강화 등이 프로젝트 경제성과 인허가에 직접 영향을 주고 있다.
글로벌 LFP 셀은 공급과잉이지만, 미국 프로젝트에 쓸 수 있고 세액공제와 금융조달 리스크가 낮은 비중국·현지 생산 LFP 셀은 부족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 지점에서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한중엔시에스 등 미국 ESS 밸류체인 기업들이 주목받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유럽은 미국과 다른 방식으로 전기차 수요 회복 가능성이 제시됐다. 미국에서는 높은 자동차 금융비용과 장거리 주행 선호, 낮은 휘발유 세금 등이 EV 확산을 막는 요인으로 작용하지만, 유럽은 높은 연료세와 도심 주행 비중, 소형차 시장, 법인차량 전동화 정책이 결합돼 보급형 BEV의 총소유비용 경쟁력이 더 빨리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유럽 완성차 업체들도 이 흐름에 맞춰 2만~3만유로대 보급형 BEV를 확대하고 있다. 보고서는 Volkswagen ID. Polo, CUPRA Raval, Skoda Epiq, Renault 5, Citroen e-C3, Fiat Grande Panda, 현대차·기아의 소형 EV 라인업 등을 대표 사례로 들었다. 프리미엄 전기차만으로는 침투율을 높이기 어렵고, 소형 보급형 BEV가 유럽 수요 회복의 중심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유럽 정책 역시 역내 생산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NZIA, 배터리 규정, 회원국별 보조금, 법인차량 세제 등이 동시에 작동하면서 유럽은 단순 가격보다 생산 지역, 탄소배출, 공급망 안정성, 고용, 산업정책을 함께 보는 시장으로 바뀌고 있다.
중국 배터리의 원가 경쟁력은 여전히 강하지만, 유럽 OEM 입장에서는 중국산 EV와 배터리에 대한 상계관세, 정치적 리스크, 탄소발자국 규제, 현지 고용 문제를 함께 고려할 수밖에 없다.
기술 측면에서는 2027년이 중요한 분기점으로 제시됐다. 보고서는 나트륨이온 배터리가 저가·저온·안전성 영역에서는 의미 있는 대안이 될 수 있지만, 장거리 EV나 대형 SUV, 고성능 차량, 항공·우주, 로봇, 고출력 특수 애플리케이션을 모두 대체하기는 어렵다고 봤다. 전체 배터리 시장을 흔드는 기술이라기보다 특정 수요 영역을 담당하는 기술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해석이다.
반대로 한국 기업에는 전고체, 46시리즈 원통형, 고율 LFP, 800~1000V 충전, LMR 등에서 기술 모멘텀이 생길 수 있다고 분석했다. 전고체는 대량 양산과 원가 검증이 필요하지만 프리미엄 EV와 고안전성 배터리 영역에서 기술 옵션으로 가치가 있고, 46시리즈 원통형은 셀 수 감소와 팩 구조 단순화, 생산 자동화, 고출력 측면에서 주목받고 있다.
결국 2차전지 산업의 하반기 관전 포인트는 전기차 판매량 하나로 설명하기 어려워졌다. 미국에서는 EV 대신 ESS가 배터리 수요의 중심축으로 떠오르고, 유럽에서는 보급형 BEV와 역내 생산 정책이 수요 회복의 질을 바꿀 수 있다. 여기에 2027년 차세대 기술 상업화 기대가 더해지면, 공급과잉에 묶여 있던 배터리 산업의 평가 기준도 다시 달라질 수 있다.
전기차 성장률 둔화는 분명한 부담이다. 그러나 AI 데이터센터와 전력망 병목, 재생에너지 저장 수요, 유럽 보급형 전기차 전환, 차세대 배터리 기술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점은 배터리 산업이 여전히 다음 사이클을 준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차전지의 반등 여부는 이제 전기차 한 대가 얼마나 팔리느냐보다, 전력 인프라와 산업 공급망이 배터리를 얼마나 필요로 하느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