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용 AI, 실시간 제어·폐쇄망·도메인 지식·현장 학습서 구조적 한계
반도체·방산 OT·에지 역량에 실제 공장 데이터까지…한국 제조자산 강점
한국은 AI 먼저·인프라 나중…데이터 전처리에 개발시간 70~80% 소요
산업연 "Vertical AI·AX 공급인프라 키우고 제조 현장 운영표준 선점해야"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과 이억원 금융위원장이 함께 7월 1일 서울 여의도 한국산업은행 본점에서 개최한 '국민성장펀드-M.AX 프론티어 프로젝트' 민관 합동간담회./연합뉴스
[더파워 한승호 기자] 미국 빅테크와 같은 범용 인공지능을 직접 만들어 경쟁하는 대신 AI를 실제 공장과 설비에서 움직이게 만드는 능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제안이 나왔다.
세계적인 제조 기반과 현장 데이터, 운영 경험을 보유한 한국이 현실적으로 경쟁할 수 있는 AI 시장은 범용 모델보다 ‘산업 특화형 AI(Vertical AI)’라는 분석이다.
8일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범용 AI를 대량 생산하는 글로벌 빅테크의 풀스택은 실제 제조현장에 적용되는 과정에서 물리 세계와의 연결, 도메인 지식, 공급 생태계, 현장 학습 등 네 가지 구조적 한계를 갖고 있다. 산업연구원은 이 영역을 한국이 보유한 제조역량과 연결할 경우 AX 공급산업의 경쟁 기반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봤다.
첫 번째 한계는 ‘속도’다. 범용 AI는 주로 클라우드 데이터센터에서 작동하지만 제조공장의 설비 제어에는 밀리초 단위의 실시간 응답이 요구된다. 원거리 데이터센터와 데이터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지연은 실제 설비를 제어하는 데 제약이 된다.
외부 클라우드 자체를 사용할 수 없는 산업도 있다. 보안이 중요한 반도체와 방위산업 등은 폐쇄망 환경을 운영한다. 이 경우 AI 모델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현장의 운영기술(OT)과 연결할 에지 연산과 별도의 통합 인프라가 없으면 실제 생산설비에 적용하기 어렵다.
두 번째는 제조현장에 쌓인 ‘암묵지’다. 범용 모델은 생산현장에서 숙련자가 경험을 통해 축적한 공정 노하우를 자동으로 갖고 있지 않다. 기능안전과 방폭, 품질관리처럼 산업별로 요구되는 규정 역시 범용 모델의 일반적인 학습만으로 처리하기 어렵다.
고장과 사고에 관한 데이터가 많지 않다는 점도 문제다. 실제 제조 현장에서는 이상 상황이 자주 발생하지 않아 학습에 필요한 데이터 확보 자체가 어렵다. 단순히 데이터를 대규모로 모으는 인터넷 기반 AI와 제조 AI의 조건이 다른 이유다.
세 번째는 공급 주체가 분리돼 있다는 점이다. 범용 지능을 만드는 클라우드·AI 기업과 이를 공장에 설치하고 설비와 연결하는 SI·IT·OT 기업이 서로 다르다. 모델과 공장 사이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누가 공급과 운영을 책임지는지도 명확하지 않을 수 있다.
네 번째는 가상과 현실의 차이다. 피지컬 AI는 시뮬레이션에서 학습한 뒤 실제 설비나 로봇에 적용되지만 가상환경과 현실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실제 현장에 배포된 이후 성능이 변하는 드리프트에 대응하려면 운영 데이터를 다시 학습에 반영하는 피드백 구조도 필요하다.
산업연구원이 한국의 기회로 본 부분이 바로 이 네 가지 빈틈이다. 한국은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 기계 등 다양한 제조업을 보유하고 있으며 공정 운영과 설비제어 경험, 현장 OT 역량을 오랜 기간 축적해왔다.
SI와 IT, OT, 엔지니어링 기업으로 이어지는 공급 기반도 존재한다. 실제 공장에서 발생하는 데이터와 운영 경험까지 결합하면 범용 AI가 물리적 제조현장에서 작동하도록 만드는 AX 공급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범용 AI와 산업 특화형 AI의 차이도 여기에 있다. 범용 AI가 산업을 가리지 않고 사용하는 보편적인 지능이라면 Vertical AI는 특정 산업의 데이터와 공정, 규제, 도메인 지식이 결합된 형태다. 제조 경험 자체가 진입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다.
산업연구원은 특히 한국과 유럽의 AX 구축 순서가 다르다는 점에 주목했다.
유럽은 AI를 적용하기 전에 산업 데이터가 움직일 인프라를 먼저 깔았다. Catena-X 등을 포함한 데이터 스페이스를 구축한 뒤 그 위에 산업 AI 플랫폼을 올리고 최근에는 에이전틱 AI와 자율운영을 적용하는 순서로 발전했다.
일부 선도기업에서는 이를 통해 생산 처리량 증가와 라인 변경시간 단축, 일부 공정의 무인화가 나타났다고 산업연구원은 설명했다.
한국은 반대 순서다. 대기업과 앵커기업 중심의 AI 팩토리를 먼저 추진하고 M.AX 얼라이언스를 확대하면서 수요를 먼저 만든 뒤 데이터 표준과 5G, AI 데이터센터 등 인프라를 뒤따라 보완하는 방식이다.
그 결과 국내 AX 개발 과정에서는 데이터 전처리에 전체 개발시간의 70~80%가 소요되는 등 아직 기초적인 지능화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게 산업연구원의 진단이다.
공급 기반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AI 수요만 빠르게 늘면 외산 솔루션의 사용도 함께 증가할 수 있다. 산업연구원은 이 과정이 국내 AX 공급 생태계를 약화시키고 다시 해외 기술 의존도를 높이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책 방향도 ‘얼마나 많은 기업에 AI를 보급할 것인가’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는 제안이다. AI 도입을 촉진하는 수요 정책과 함께 실제 공장에 AI를 설치하고 운영할 국내 AX 인프라 기업을 육성하는 공급 정책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반도체와 방산처럼 폐쇄망과 실시간 제어가 필요한 분야, 제조 노하우가 중요한 산업, 실제 현장 데이터와 학습 루프가 필요한 피지컬 AI 분야가 국내 기업이 공급역량을 확보할 수 있는 영역으로 제시됐다.
산업연구원이 마지막으로 강조한 것은 ‘운영 표준’이다. AI 칩과 개발도구 같은 기술표준은 미국 기업들이 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고 기업 간 데이터 공유 규칙은 유럽이 선점에 나선 상태다.
반면 AI가 공장을 스스로 운영할 때 필요한 규칙은 아직 경쟁이 진행 중인 영역이라는 분석이다. 공정의 이상 여부를 어떤 기준으로 판단할지, 여러 설비가 어떻게 자율적으로 협력할지, 안전과 품질의 임계치를 어디에 둘지 등이 운영 표준에 해당한다.
이 기준은 실제 공장을 돌려본 경험과 현장 데이터가 없으면 만들기 어렵다. 산업연구원이 한국의 제조업 경험을 AI 시대의 전략자산으로 보는 이유다.
한국이 노릴 자리가 세계 최대의 범용 AI 모델을 만드는 경쟁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게 이번 분석의 핵심이다. 이미 만들어진 지능을 반도체 공장과 자동차 생산라인, 로봇과 설비에서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작동하게 만드는 시장에서는 제조업의 축적된 경험이 경쟁력이 될 수 있다.
AI를 사용하는 제조강국에 머무를지, 제조 AI를 공급하는 국가로 올라설지는 이 지점에서 갈린다. 산업연구원은 AX 확산과 함께 국내 공급 인프라를 키우고, 나아가 자율제조의 운영 규칙까지 선점하는 것을 AI 시대 산업 주권을 확보하기 위한 현실적인 방향으로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