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파워 한승호 기자] 미국·이란 종전이 한국 산업에 같은 방향의 회복을 가져오지는 않을 전망이다. 호르무즈 통항 재개와 에너지 가격 반락은 공통적인 부담 완화 요인이지만, 산업별 원가 구조와 수요처, 공급과잉 정도에 따라 회복 속도는 크게 갈릴 수 있다는 분석이다.
산업연구원은 ‘미국-이란 종전 이후 호르무즈 리스크와 한국 산업 영향 및 대응 방향’ 보고서에서 종전은 산업 충격을 일괄 해소하는 계기가 아니라, 비용 전가와 신규 수요 확보가 가능한 산업과 구조적 공급과잉·수요 둔화에 노출된 산업을 가르는 K자형 분기점이 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상대적으로 기회가 커지는 업종은 조선, 방산, 일부 중동 건설, 반도체다. 반대로 석유화학과 자동차, 일부 건설 부문은 비용 부담과 수요 둔화가 회복을 제약할 가능성이 크다.
조선은 호르무즈 사태 이후 수송 경로 재편의 수혜를 받을 수 있는 업종으로 꼽혔다. 에너지 안보가 중요해지면서 LNG 공급선 다변화와 미국 LNG 프로젝트 확대가 고부가 LNG 운반선 발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중소형 탱커인 수에즈막스와 아프라막스급 선박은 다양한 항만과 항로에 투입하기 쉬워 대체 산지와 대체 노선 수요에 대응할 수 있다. 해상 물류가 단일 경로 의존에서 다중 경로로 바뀔수록 선박 운용 유연성이 높은 선종의 수요가 상대적으로 견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초대형 원유운반선, VLCC는 리스크가 남아 있다. 중동에서 아시아로 직항하는 물량 의존도가 높아 호르무즈 통항 차질이 장기화될 경우 물량 충격이 나타날 수 있다.
방산도 수요 확대 가능성이 있는 업종으로 분류됐다. 걸프 지역에서 미사일과 드론 방어 수요가 커지고, 미국 안보 의존을 유지하면서도 조달선을 다변화하려는 흐름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방산은 가격, 납기, 신뢰성, 상호운용성 측면에서 중간층 방공체계 공급자로 부상할 여지가 있다는 평가다. 다만 생산능력과 납기 여력이 빠르게 소진되고 있어 단기 수요 확대가 실제 수출로 이어지려면 증설, 인력, 부품망 확보가 병목이 될 수 있다.
반도체는 직접 충격이 제한적이지만 새로운 수요 요인이 부상할 가능성이 있다. 호르무즈 사태로 헬륨, 브롬 등 특수가스의 중동 의존과 LNG 연계 전력비 부담이 잠재 리스크로 부각됐지만, 재고와 장기계약, 공급선 다변화로 단기 충격은 상당 부분 흡수 가능한 수준으로 평가됐다.
오히려 중동의 AI 인프라 투자가 서버용 메모리와 HBM 수요로 연결될지가 관건이다. 보고서는 사우디아라비아 HUMAIN, UAE G42 등 걸프 지역 데이터센터 구축이 GPU 확보 경쟁과 서버용 메모리·HBM 수요 확대로 이어질 수 있다고 봤다.
다만 걸프 국가들이 안보 지출을 늘릴 경우 AI 투자와 재정 우선순위가 경합할 수 있다는 점은 변수다. 중동발 AI 인프라 투자가 실제 반도체 수요로 얼마나 이어질지는 국가별 재정 여력과 프로젝트 추진 속도에 좌우될 가능성이 있다.
건설은 기회와 리스크가 함께 존재한다. 종전 이후 복구와 핵심 인프라 수요가 부상하면서 중동 EPC 경험이 많은 국내 건설사에 선별적 수주 기회가 열릴 수 있다. 보고서는 전후 복구 수요가 약 340억~580억달러 규모로 형성될 가능성을 제시했다.
다만 과거처럼 저가 수주만으로 접근하기는 어려워졌다. 급등기에 높아진 공사 단가가 단기간에 낮아지기 어렵고, 발주처의 현금 여력도 약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중동 수주는 금융 조달 동반, 현지화 대응, 수익성 관리 역량이 좌우할 가능성이 크다.
석유화학은 가장 부담이 큰 업종 중 하나로 분석됐다. 호르무즈 봉쇄 기간에는 공급 차질이 일부 가격을 지탱했지만, 종전 이후에는 글로벌 공급과잉이 다시 부각될 가능성이 크다.
중국발 증설 누적에 더해 중동산 제품 복귀와 신증설이 겹치면 과잉 공급이 재표면화될 수 있다. 한국 석유화학은 나프타 기반 고비용 구조라는 약점도 안고 있어 설비 감축과 고부가 전환 압력에 노출될 수 있다.
다만 중장기적으로는 유럽과 일부 아시아의 고비용 설비가 퇴출되면서 수급이 점진적으로 개선될 여지는 있다. 범용 제품 축소와 고부가 제품 전환에 성공하는 기업은 선별적 수혜를 볼 수 있다는 분석이다.
자동차는 중동 수요 일부 회복에도 전체 업황 회복은 제한될 가능성이 있다. GCC 지역은 자동차 수입 의존도가 높아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완화되면 봉쇄 기간 지연된 수요가 회복될 수 있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 등 주력 시장에서는 고유가, 고금리, 관세 부담, 소비심리 둔화가 겹쳐 수요 회복이 제약될 수 있다. 수출 변동성 확대도 부담 요인이다.
산업연구원은 산업별 대응도 차등화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피해가 큰 부문에는 비용 보전과 조달 안정을 지원하고, 기회가 있는 부문에는 금융, 현지화, 수주 역량 강화를 집중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통항·보험·운임 비용을 구조적 안보 비용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전쟁위험보험료 급등분에 대해서는 무역보험 등 정책금융을 통한 분담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 무역금융의 리스크 프리미엄 부담을 낮추는 지원도 필요하다.
공급망 다변화도 중요하지만 단순히 한 지역 의존을 다른 지역 의존으로 바꾸는 방식은 경계해야 한다. 위기 때 수입선을 다변화했다가 가격이 안정되면 다시 최저가 중심 단일 공급선으로 돌아가는 방식으로는 복원력을 높이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핵심 원자재별 최소 재고 기준, 다변화·장기계약 인센티브, 전략비축 대상 품목 확대도 검토 과제로 제시됐다. 원유와 LNG뿐 아니라 황산, 비료, 금속 소재처럼 제3국 생산공정에서 투입재로 쓰이는 품목까지 조기경보 체계를 넓혀야 한다는 것이다.
물류 전략도 바뀌어야 한다. 호르무즈 해협은 단순 수송로가 아니라 통행 조건 변경, 통항 비용 부과, 공급 지연을 통한 압박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이 확인됐다.
따라서 조달 전략은 원료 가격만 볼 것이 아니라 항로 안정성, 보험 조건, 대체 가능성, 재고 비용까지 함께 평가해야 한다. 대체 항로별 비용과 소요일수를 상시 모니터링하고, 항만·해운 정보 공유체계를 통해 우회와 재배치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시스템도 필요하다.
산업연구원은 “안보의 무게를 가격 안정에서 공급 신뢰성과 공급망 탄력성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밝혔다. 종전 이후에도 호르무즈 리스크가 한국 산업의 비용 구조와 수주 기회, 공급망 전략을 바꾸는 변수로 남을 수 있다는 의미다.